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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명함

등록 2014-10-27 18:44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라 했으나,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 선을 긋는 일이 쉽지는 않다. 특히 사람에 대해서는. 이름도 직업도 모르지만 가끔 엘리베이터를 함께 이용하는 이웃 주민도 ‘아는 사람’이고, 같은 사무실에서 매일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수십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 사이의 언쟁에서도 “당신이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는 말이 튀어나오곤 하는데 진정 ‘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에 관한 앎의 범주가 다양한 만큼 사람을 알아가는 계기와 과정도 다양하지만, 현대 성인들의 관계가 ‘모르는 사이’에서 ‘아는 사이’로 전환되는 가장 흔한 계기는 이름과 직함을 써넣은 쪽지인 명함을 교환하는 의례다. 명함의 역사는 길다. 조선시대에도 새 관직을 얻은 사람은 유관 기관에 명함을 돌려야 했는데, 직급에 따라 종이의 질과 크기가 달랐다. 명함은 ‘아는 사람’ 집에 방문했다가 주인이 없어 그냥 돌아올 때에 남기는 방문 증명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직함을 가진 사람이 드물었기에, 명함을 사용하는 사람도 매우 적었다.

명함 사용이 급증한 것은 직함을 가진 사람이 늘어나는 사회 변동과 작고 두툼한 종이에 작은 글씨를 새길 수 있는 인쇄 기술의 발전을 거친 뒤였다. 1897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간 인쇄소인 이문사가 명함 인쇄를 시작했다. 당시 명함의 규격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00년께에는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86×52㎜)과 대략 같은 크기의 명함이 통용되었다. 더불어 명함은 다른 물건, 즉 사진의 규격을 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명함 교환이 현대 성인들의 일상적인 의례가 되었다고는 하나, 명함을 갖지 못한 사람도 많다. 60년대의 시인 김관식은 ‘대한민국 김관식’이라 새긴 명함을 들고 다니며 직함 중심 사회에 맞섰다. 하지만 지금도 이렇다 할 직장을 갖지 못한 청년들의 꿈은 명함을 갖는 것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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