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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전등

등록 2014-11-10 18:41

소설이나 영화 속의 뱀파이어, 강시, 좀비, 악령, 도깨비 등은 밤에만 활동한다. 햇빛이 비치는 낮은 그들의 시간이 아니다. 옛사람들은 같은 맥락에서, 밤은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고 믿었다. 낮과 밤은 하루를 양분할 뿐인 균질의 ‘시간대들’이 아니었다. 낮은 선, 생명, 광명, 정의의 시간대였고, 밤은 악, 죽음, 암흑, 불의의 시간대였다. 인간은 불을 이용해 이 공포 덩어리에 맞섰으나, 그것이 제공하는 보호막은 너무 좁고 약했다. 이 보호막을 확장, 강화하여 밤이 없는 도시, 즉 불야성을 만들어 보겠다는 것은 오랜 세월 인류의 꿈이었다.

전등은 이 꿈을 비로소 실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나라에서 전등이 처음 빛을 발한 것은 토머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지 불과 8년 뒤인 1887년 2월10일, 경복궁 안에서였다. 하지만 이때의 전등은 도깨비를 물리치는 무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도깨비의 일종이었다. 전등이 구중궁궐에서 벗어나 도시 공간의 일부를 밝히기 시작한 것은 1900년 4월19일부터였다. 이날 밤, 한성전기회사 사옥(현재 와이엠시에이 서쪽 장안빌딩 자리) 주변에 설치된 전기 가로등 3개가 빛을 발했다. 이후 전등을 설치하는 도시 민가는 계속 늘어났고, 10여년 뒤에는 서울 시내에 아예 밤에만 영업하는 야시(夜市)까지 등장했다. 물론 전등이 순식간에 밤을 정복한 것은 아니다. 시골 농가 방방에 전등이 달린 지 이제 겨우 반세기가 지났을 뿐이며, 그래도 농촌의 밤은 어둡다.

전등을 이용해 밤을 정복함으로써, 사람들은 이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인들은 밤에조차 쉬지 않고 일하고 놀며 먹고 마신다. 한 세기 전보다 평균 기대 수명이 두배 가까이 늘어난 것을 고려하면, 현대인이 실제로 생활에 소비하는 시간은 세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시간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소비하면서도 더 큰 부족을 느끼는 것은, 현대인이 앓는 고질병의 대표 증상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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