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이 만들어낸 최고의 명품은 1987년 헌법재판소”라는 찬사가 있긴 하지만, 헌재가 처음부터 관심과 기대 속에 탄생한 것은 아니었다. 87년 국회에서 개헌안을 만들 당시 여야는 모두 “헌법재판소에 대해 그리 신경을 안 썼다”고 한다. “정치인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탓이다. 여당인 민정당은 위헌법률심사권은 대법원에 주되 정당해산심판권·탄핵심판권·권한쟁의심판권 등 정치적 문제는 독립된 헌법위원회에서 맡도록 하자고 주장했고, 야당은 그럴 것 없이 대법원에 다 맡기자는 입장이었다. 나중에 재야의 제안으로 헌법소원 제도가 도입되면서 여야는 “별다른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지금의 헌법재판소 제도에 합의했다.(<헌법재판소 20년사>에서) 당시 여당은 독립기관으로 헌재를 설치하더라도 과거 헌법위원회처럼 운영하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헌법위원회는 72년 유신헌법에 의해 만들어진 뒤 16년 동안 단 한 건의 위헌심판도 심리하지 못했다.
그렇게 물려받을 것 하나 없이 태어난 헌재가 지금 26살이다. 그동안 위헌성이 있는 법률들을 수백건 정비하고 행정수도 이전, 대통령 탄핵 등 중요 사건들을 다루며 헌헌장부로 커왔다. 이제는 한 번도 다뤄보지 않았던 정당해산심판 사건까지 결정하게 됐다.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사건은 25일 최종변론을 거쳐 이르면 연내에 선고할 수도 있다고 한다.
사람살이에 고비가 여러 차례 있듯, 이번 사건은 청년 헌재에게 중요한 도전일 것이다. 한 단계 성장하는 기회일 수 있지만, 어쩌면 자신의 뿌리에 칼질을 하며 주저앉는 위기가 될 수도 있다. 이번 사건이 헌재의 근본에 닿는 문제인 탓에 그렇다.
헌재를 낳은 87년 헌법은 1980년대 군사독재정권에 맞선 시민항쟁의 산물이다. 군사독재 대신 민주주의의 수립과 복원을 선언한 것이 지금의 헌법이다. 그 민주주의는 다원성과 가치상대주의를 이념적 기초로 삼는다. 모두 교과서에 나온 얘기다. 헌재도 헌법이 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한 것은 “관용과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는 다원적인 ‘열린 사회’에 대한 헌법적 결단”이라고 밝힌 바 있다. 헌재는 그 정신 위에 세워진 87년 체제의 주요 구성원이다.
단순화하자면, 이번 사건은 통합진보당 같은 ‘위험한’ 정당에는 다원성과 관용을 인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법무부가 그렇게 주장하며 헌재에 심판청구를 냈다. 하지만 정작 그 위험성이 정당을 강제해산해야 할 정도인지는 제대로 증명하지 못한 듯하다. 헌법 분야에선 유엔 같은 기구인 ‘베니스위원회’가 “정당해산제도는 집행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며 그나마 이 정도는 돼야 한다고 내놓은 기준이, 반민주적 정당이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그 폭력이 실질적 위험을 불러오는 경우여야 한다는 것 등이다. 그 기준대로 통진당이 한심하다는 손가락질이나 조롱거리를 넘어, 우리 헌정체제를 뒤엎을 만한 현실적이고 명백한 위험으로 확인됐는지는 의문이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선거 등 정치적 과정을 통한 국민의 선택에 맡기는 것이 관용과 다원성을 본질적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의 대응방식이다. 그러는 대신 국가가 나서서 해산시키려 하는 것이야말로 국민의 정치적 능력을 불신하는 것이 된다. 헌재가 그런 결정을 내린다면 국민의 지지와 기대 속에 이만큼 커온 헌재의 미래도 불투명해진다. 나아가 통진당에 휘두른 ‘종북’이라는 잣대를 다른 정당, 단체에까지 마구잡이로 휘둘러 마당 밖으로 밀어내는 사태가 온다면, 나라 전체가 입을 막고 귀를 막아야 했던 87년 이전의 권위주의 시대로 퇴행하게 된다. 헌재는 지금 그런 위험한 선택 앞에 서 있다.
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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