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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선우의 빨강] 넘어지면 하늘을 보자

등록 2014-11-17 18:35

김선우 시인·소설가
김선우 시인·소설가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아파트 관리실 경비 할아버지를 자주 본다. 분리수거함 정리가 소임 중 하나인 그분은 마주치는 주민들에게 늘 ‘좋은 날 되셔요!’라고 인사를 한다. 약간 비음이 섞인 기분 좋은 목소리다. 그분 때문에 나는 ‘되세요’와 ‘되셔요’의 우리말 발음 차이에 골똘한 적이 있다. 의미는 마찬가지인데 ‘되셔요’ 쪽이 더 정성스럽게 들리는 느낌이어서, 요즘 나도 종종 ‘되셔요’를 쓰곤 한다. 며칠 전 그분이 종이수거함 앞에서 작은 책자 하나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계셨다. 까슬하게 튼 할아버지의 맨손등 위에 한낮의 흰 햇살이 어룽거렸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할아버지가 보고 있던 게 분리수거 된 책자가 아니라는 걸. 할아버지는 코팅된 책 표지에 반사된 햇빛이 손등 위에 어룽대는 무늬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던 거다. 그러자 그 순간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뜬금없이 내 머릿속에 조르조 아감벤의 ‘예외상태’라는 말이 떠올랐다. 법의 효력이 정지되는 공백상태, 법률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경계에 존재하는 이 딱딱한 용어에 나는 돌연 ‘미학적 예외상태’라는 수식어를 붙여놓고 혼자 흥얼거렸다. 그래. 친구에게 편지를 쓰자. 샤워하며 콧노래를 부르자. 운전을 하다 큰소리로 웃어보자. 넘어지면 등을 대고 하늘을 보자. 사소하지만 좋지 않은가. 의도하지 않았으나 미학적이라고 할 어떤 모호한 일상의 예외상태를 자주 경험할수록 삶은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김선우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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