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재 스포츠부장
경기에 이겼는데도 감독은 “그걸 축구라고 하냐”며 ‘골대 찍고 선착순’을 시킨다. 패스를 제때 하지 않거나 수비 위치를 제대로 못 잡으면 여지없이 불호령이 떨어진다. 벤치만 지키던 한 아이가 용기를 내어 묻는다. “저는 언제 게임을 뛰나요?” 감독은 싸늘한 시선과 함께 “네가 감독 해라”라고 쏘아붙인다. 지역 리그에서 성적을 내기 위해 다른 팀에서 잘하는 선수를 빌려온 탓에 몇몇 아이는 줄곧 후보 신세다. 감독의 혹독한 훈련과 성적지상주의는 축구선수가 꿈이었던 아이들을 오히려 축구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든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지역아동센터에서 운영하는 팀인데도 말이다. 감독은 결국 팀을 떠나고 만다.
지난달 개봉해 입소문을 타고 있는 영화 <누구에게나 찬란한>은 이 팀(경남희망FC)에 새로 부임한 김태근 감독이 아이들을 다시 축구선수의 꿈을 꿀 수 있게 만드는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채찍’ 대신 칭찬과 격려를, 성적 대신 재미를 앞세우는 김 감독 밑에서 아이들이 서서히 바뀌는 모습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영화의 주인공은 단연 김 감독과 아이들이지만, 전임자인 박철우 감독의 잔상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박 감독이 처음부터 모진 감독은 아니었다. 한 보육원에서 축구를 가르칠 땐 ‘천사’에 가까웠다. 체벌과 구타를 일삼는 다른 보육원 코치들과 전혀 달랐다. 단순한 축구 코치가 아니라 큰형님이자 아버지였다. 불우한 환경 탓에 어둡고 소극적이던 아이들은 그와 함께 뛰면서 밝고 건강하게 변했다. 그의 훈련 스타일이 바뀐 건 보육원에 정식 유소년팀을 만드는 일이 실패한 뒤부터다. 독지가의 후원으로 팀 경비를 마련했지만 보육원 책임자들은 아이들을 내주지 않았다. ‘가난해서 어차피 중간에 축구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재능이 아니라 돈 때문에 축구를 그만둔다면 아이들은 더욱 큰 상처를 입을 것이다. 눈물을 펑펑 흘리는 아이들에게 박 감독은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는 말을 남기고 버스에 오른다. 스크린에 비친 그의 표정엔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경남희망FC의 초대 감독을 맡은 뒤 스파르타식 훈련을 걱정하는 구단주(지역아동센터장)한테 박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후원자들이 낸 기부금이 아깝지 않게, 아이들이 시간낭비 하지 않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적을 내지 못하면 후원금이 끊기고 결국 아이들의 꿈도 지켜주지 못할 거라는 얘기다. 돈 없으면 재능을 펼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세상에서 가난한 아이들이 기댈 것은 혹독한 훈련밖에 없을지 모른다. 박 감독은 관객들에게 ‘현실을 냉정하게 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영화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그의 말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 경남희망FC는 해체됐고 아이들은 김태근 감독이 운영하는 축구교실에서 공을 찬다. 지금은 중학생이 된 아이들은 더 이상 축구선수가 될 꿈을 꾸지 않는다고 한다. “축구에 천부적인 재능이 없다면 가난한 애들이 부모의 든든한 지원을 받는 애들과 경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은 다 돈이더라.” 팀 단장인 이은경 경남 함안 사랑샘지역아동센터장의 말이다. 박 감독의 스파르타식 훈련과 성적지상주의가 나름 이유가 있음이 입증된 셈이다.
후원금으로 근근이 버티던 경남희망FC는 영화 제작이 끝난 뒤 후원자들의 관심이 급격하게 식어 재정난에 부닥쳤다. 학교 축구팀에 스카우트됐던 한 아이는 팀 회식비와 코치 수고비 등 ‘비공식적인’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축구교실로 되돌아왔다. ‘칭찬과 격려’만으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박 감독에게 성적에만 매달리지 말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나 찬란한’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춘재 스포츠부장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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