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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정말 미안합니다 / 윤태웅

등록 2014-12-11 18:45

윤태웅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윤태웅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성추행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희 대학 이야기입니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입니다. 대학의 구성원으로서, 또 지금은 학교를 떠난 가해 교수의 옛 동료로서, 피해자와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학생들에게 사과하고 싶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제 주변엔 저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강의시간에 수강생들한테 사과한 교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총장이나 학장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교수가 사표를 내면 대학이 이를 바로 수리하는 게 거의 관례가 돼 버린 듯합니다. ㄱ대학에서도 최근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서울대도 성추행 교수의 사표를 수리하겠다고 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고 이를 번복한 바 있습니다. 사표가 수리되면, 대학의 인권센터나 양성평등센터에서 진행하던 진상조사도 중단됩니다. 상황은 대개 그렇게 끝이 납니다. 잘못된 일입니다.

사표 수리도 물론 처벌입니다. 가해자가 대학의 교수 자리를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저희 대학 교무처에서는 사표 수리 자체가 아주 무거운 처벌이라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성추행 교수가 징계도 받지 않고 강의를 계속해온 ㅈ대학의 사례에 견주면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지요. 반면에 사표 수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면직이 너무 약한 처벌이라 여깁니다. 이들은 해임이나 파면과 같은 강한 징계를 통해 가해자가 다시는 교단에 설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표 수리가 이미 무거운 처벌이라는 저희 대학 교무처의 견해는 논리적으로 정당화하기 어렵습니다. 가해 교수의 잘못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조사하지 못한 채 내린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표 수리가 충분히 강한 처벌이 될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런 결론은 진상을 조사하고 규명한 뒤에야 나올 수 있는 것이겠지요.

저희 대학은 또 사립학교 교원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을 법적 근거가 없다는 논리도 폅니다. 하지만 사표 수리를 무한정 유예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사표를 당장 수리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설령 사표 수리가 불가피했다 하더라도, 이어 진상조사까지 중단하는 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표를 내고 떠난 사람이 학교의 진상조사에 협조하지 않아도, 사건이 발생한 학과의 구성원과 피해자를 대상으로 조사를 계속할 순 있을 테니까요. 이건 의지의 문제입니다.

진상 규명의 목적은 단지 가해자를 징계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사건 발생의 구조적 요인 등을 파헤쳐 비슷한 일이 다시 생기지 않게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사표 수리가 진상 조사의 중단으로 이어져선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아울러 이 불행한 사태를 계기로 학생의 인권에 관한 고민을 대학 당국이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지도교수와 대학원생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도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저 자신을 포함해 대학에 남은 교수들한테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학생들에겐 거듭 미안합니다. 저는 2005년 5월을 기억합니다. 이건희 회장의 명예 철학박사 학위 수여식이 있던 날인데, 일부 학생들이 그만 행사를 방해하고 말았습니다. 총장은 바로 다음날 이에 대해 깊이 사과했고, 처장단은 긴급회의를 열어 집단 사퇴서를 내기까지 했습니다. 이번 성추행 사건은 2005년 사태보다 더 가슴 아픈 일입니다. 피해를 호소하며 학업을 중단한 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학교의 노력은 부실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고려대학교 총장이 사과해야 할 이유는 충분해 보입니다.

윤태웅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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