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 리나후도(linajudo)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명문가의 사람’으로 풀이돼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통용된 뜻은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으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 증거를 수집하고 뒤지는 사람’이 이들이다.
근대 초기인 16세기에 스페인은 유럽의 패권국이자 ‘약탈적 세계화’의 선두주자였다. 당시 스페인의 강점이자 최대 약점이었던 게 있다. 신앙과 피의 순수성에 대한 남다른 집착이 그것이다. 모두 공통의 규범에서 벗어난 이들을 철저하게 의심하고 배제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신앙의 순수성은 종교재판소에서, 피의 순수성은 순혈령이라는 법령을 통해 단죄됐다. 애초 라틴계 인종과 유대인·무어인(아랍계 이슬람교도)·아프리카인 등이 공존하던 스페인은 이렇게 공동체 구성원을 위계화함으로써 결국 힘을 잃어간다. 신세계 원주민에 대한 극심한 차별은 이런 국내 구조를 지구촌 차원으로 확장한 것이다.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 피의 순수성을 입증해야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목숨을 건 약점 잡기가 성행할 수밖에 없다. 낮은 신분에 속했던 사람들은 기존 귀족들의 조상이 의심스럽다고 공격했고, 귀족들은 지위 상승을 꾀하는 이들이 조상대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비난했다. 기존 귀족의 조상을 추적하는 것이 훨씬 쉬웠으므로 이들은 한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애초에는 4대 조상까지 따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까마득한 옛날까지 올라갔다. 이런 일을 집요하게 한 사람들이 리나후도다. 이들은 유럽 나라들 가운데 스페인에서 가장 번성했던 종교재판소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최근 ‘비선 전횡 의혹’으로 드러난 박근혜 정부의 모습을 보면, 리나후도들이 활개쳤던 스페인을 연상시킨다. 둘 다 자신이 정통임을 주장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파멸시켜야 하는 구조다. 이름에 걸맞은 명예나 사명감도 없이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아 밀어내야 내가 살 수 있다면 그 권력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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