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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통장

등록 2014-12-29 18:47


현물경제 시대 우리나라에서 ‘저축’이란 말은 쌀, 포목, 소금 등을 항아리나 궤짝 등에 담아두거나 창고에 쌓아두는 것을 의미했다. 금속화폐의 등장은 저축할 대상을 쓸모 있는 물건들에서 별 쓸모없는 구리조각으로 전환시켰으며, 돈을 담아두기 위한 물건, 즉 돈궤도 출현시켰다. 돈궤는 ‘있는 집’ 안방 깊숙한 곳에 자리 잡는 즉시, 신줏단지와 같거나 그보다 높은 대우를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돈을 맡아 보관해주는 근대적 은행이 처음 출현한 것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직후였다. 이해 부산에 있던 일본인들이 사설 은행을 만들었는데, 이는 2년 뒤 제일은행 부산지점이 되었다. 한국인들이 은행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갑오개혁 때 모든 세금을 돈으로 납부하게 하면서부터였다. 1894년 7월10일 군국기무처는 국립은행을 설립하기로 의결했으나, 필요한 돈을 마련하지 못한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개화파 내각이 붕괴함으로써 의결에 그치고 말았다. 중앙은행이 없는 상태에서 국고금을 취급할 목적으로 1896년 대조선은행, 1897년 대한특립제일은행과 한성은행, 1899년 대한천일은행이 잇달아 설립되었다. 은행 설립과 함께 예금증서이자 출금보증서에 해당하는 통장도 생겼으나, 정부가 악화인 백동화를 남발하여 통화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은행에 돈을 맡기고 통장을 받아두려는 바보는 없었다. 한국인들이 집 안에서 돈궤를 치우고 대신 통장을 숨겨 두기 시작한 것은, 국가 권력이 지급을 보증하는 체계가 마련된 뒤의 일이니 이제 겨우 한 세기가 조금 넘었을 뿐이다.

통장은 현대인의 신줏단지다. 이 물건에 기입된 양의 숫자가 계속 늘어나면 ‘축복받은 인생’, 음의 숫자가 계속 늘어나면 ‘저주받은 인생’이다. 이 물건에 기입된 숫자는 잘만 섬기면 ‘영생불멸’하며, 커질수록 ‘전지전능’해진다. 현대인에게 자기 통장에 기입된 숫자는 자기의 수호신이다. 다만 이 신은 인간이 섬겨 온 과거의 신들과는 달리, 정의와 사랑에는 전혀 무관심하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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