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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포이에티케 인문학 / 고명섭

등록 2014-12-30 18:39

이달 3일 오후 서울대 인문대 교수회의실. 서양고전학 협동과정 창립 25돌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고전문헌학자 김헌 교수의 발표문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발표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포이에티케>를 둘러싼 문헌학적 상황이었다. 김헌 교수는 이 저작을 새로 번역하느라 10년 세월을 쏟아붓고도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결정적인 걸림돌 가운데 하나가 제목이다. 이 책은 20세기 초에 일본에서 처음 번역한 이래로 ‘시학’이라고 옮기는 것이 관례다. 그러나 김헌 교수는 문헌학자의 꼼꼼함으로 검토를 거듭한 끝에 ‘시학’이라는 번역어는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고백했다. 책 제목 ‘포이에티케’(poietike)는 본디 ‘짓다, 만들다, 지어내다’라는 뜻의 동사 ‘포이에인’(poiein)에서 파생한 말이며, ‘만드는 기술’, ‘지어내는 기술’, ‘제작술’, ‘창작술’을 뜻한다.

김헌 교수는 포이에티케의 어원을 살리려면 시학이라는 번역어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저작에서 ‘짓기’의 여러 갈래 가운데 ‘시 짓기’가 아닌 ‘이야기 짓기’에 주목했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김헌 교수는 ‘짓기술’이라는 말을 새 번역어로 제안했다. ‘짓기의 기술’이자 ‘짓(행위)의 기술’이라는 뜻이다. 심포지엄장은 일순 뜨거워지면서 ‘너무 파격적이다’, ‘문학의 시원을 파괴한다’와 같은 반론이 넘쳤다. 그러는 중에 동료 문헌학자 안재원 교수는 “‘짓다’라는 말은 우리말의 가장 기초적인 동사에 속하는데, 이런 말을 학술적 개념어로 살려내지 못한다면 우리말 인문학은 영영 불가능하다”며 김헌 교수를 거들었다. 노래를 짓고, 글을 짓고, 집을 짓고, 죄를 짓는 그 짓기의 의미를 ‘시학’이라는 좁은 말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번역은 단순히 말을 옮기는 일이 아니다. 이날 심포지엄은 번역이야말로 ‘포이에티케’의 실천, 곧 창조의 과정임을 보여주었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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