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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퇴화하는 한국 사회에서 / 이제훈

등록 2015-01-07 18:44수정 2015-01-07 22:28

이제훈 사회정책부장
이제훈 사회정책부장
과학의 목적이 (불변의 절대) 진리 추구라는 관념은 일신교적 종교관의 유물이라며 “우리가 지금 신봉하는 이론이 나중에 변할 리 없다고 믿고 싶은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고 한 이는 <온도계의 철학>과 <과학, 철학을 만나다>를 쓴 저명한 과학철학자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다. 토머스 쿤도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의 선택은 실험·증명이 아닌 설득·동의로 이뤄진다며 절대진리론을 기각했다. 통념을 뒤집는 이런 주장은 당위론이나 윤리학 강의가 아니다. 오랜 과학사 연구의 결과다.

장하석 교수는 다원주의적 과학(관)을 권하는 쪽으로 한발짝 더 내딛는다. 한가지만 맞고 다른 것은 틀렸다고 할 게 아니라, 여러 실천체계를 발달시키고 유지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다원주의 과학엔 ‘관용의 이득’과 ‘상호작용의 이득’이 있단다. 타자의 존재를 존중하는 관용의 유연성은 ‘예측 불허의 상황에 대비하는 보험’이기도 하다. 관용은 지적 분업도 촉진한다. 예컨대 온도계엔 극저온에서 초고온까지 일관되게 적용할 수 있는 단일 기준이 없다. 수은 온도계는 ‘영하 40도 밑, 영상 355도 이상’에선 무용지물이고, 기체 온도계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온도 영역에 따라 다른 기준을 쓰는 이유다. 상호작용에 따른 융합의 이득도 있다. 운전자의 필수품이 된 길 찾기 내비게이션이 그 사례다. 내비게이션의 기반인 지피에스(GPS·전지구측위시스템)에는 뉴턴역학과 양자역학, 상대성이론이 두루 활용된다. 이런 과학적 성과는 ‘하나만 맞다’는 태도로는 이룰 수 없다.

자연과학이 이럴진대 사람 사는 세상에 무슨 불변의 진리가 있을까. 나는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에서 아직 취약한 한국 사회의 다양성을 옥죄는 퇴행, 주류 기득권 세력의 시대착오적 폭주를 읽는다. 박한철 소장 등 재판관 8인은 결정 근거의 하나로 ‘한국 사회의 특수성-남북한의 대립’을 들었는데, 북한은 “미수복지구의 반국가단체”일 뿐이다. 두차례의 정상회담(6·15 공동선언, 10·4 정상선언) 등 화해협력의 노력·성과는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이들한테 한국은 아직도 ‘전쟁국가’이자 ‘비상국가’다. 오직 한 사람, 해산 결정에 반대의견을 낸 김이수 재판관만이 “북한은 대한민국에서 반국가단체인 동시에 평화적 통일을 위한 대화와 협력의 동반자로서의 성격도 가진다”며 “어느 한 가지만 강조하는 것은 우리 헌법이 예정하고 있는 북한과의 관계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바르게 짚었다. 비유컨대 남과 북은 샴쌍둥이다. 한쪽을 떼어내려다 둘 다 죽는 수가 있다. 위험은 외과수술적 제거가 아닌 관용과 상호작용으로 해소해야 한다. 한국전쟁의 교훈이다.

하지만 헌재 재판관 8인은 진보당 해산 결정으로 10만 당원(당비를 내는 진성당원은 3만명)을 사실상 ‘비국민’으로 낙인찍었다. 진보당의 “당원·지지자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므로 국민의 영역에서 떠나보낼 수는 없”고, 그들의 “사상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김이수 재판관의 지적엔 귀를 닫았다. “소수의 생각과 주장은 다수의 의견이 혹시 그릇된 것인지, 만약 그릇된 것이라면 어떤 측면에서 오류를 가지는 것인지를 지속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거울”이라는 김 재판관의 호소도 외면했다. 오히려 안창호·조용호 재판관은 진보당 해산 결정에 반대하는 이들을 “광장의 중우, 기회주의 지식인·언론인, 사이비 진보주의자, 인기영합 정치인”이라고 비난했다. 헌재의 1 대 8 쏠림은 4 대 6 정도라는 일반 시민의 의견 분포보다 극단적이다.

찰스 다윈이 거듭 강조하지 않았던가. 진화란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라고. 다양성의 훼손·위축은 퇴화라고.

이제훈 사회정책부장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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