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시사 주간 <샤를리 에브도> 테러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기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샤를리 에브도가 프랑스 내 소수민족인 무슬림들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만화를 많이 게재해서 이번에 공격 대상이 되었기에, 이른바 일베가 여기서 불러일으킨 ‘표현의 자유 제한론’ 또는 ‘무용론’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우선 쉬운 답부터 하자면 표현의 자유는 법 개념이지 도덕 개념이 아니다. 즉 개인이 속한 공동체가 그 개인에게 무엇을 강제할 수 있는가를 정하는 기준이지, 개인이나 공동체가 취한 행동이 선하거나 올바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다. 샤를리 테러에 대한 현재의 어떤 담론도 샤를리 방식의 만화를 규제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다. 단지 ‘나는 샤를리다’에 동참하기 어려운 이유들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일베 규제 논쟁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 자체는 위기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표현의 자유의 바탕을 이루는 다원주의 이념은 위기가 아니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각자의 표현이나 생각이 타인에게 불쾌하거나 이해 불가 하더라도 그 자체로 보호되어야 한다’는 이념 말이다. 결국 이번 사태는 어떤 표현이나 생각들은 보호되는 것이 궁극적으로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주장이다. 간단히 답하자면 샤를리는 그런 사례는 아니다.
샤를리 만평을 되도록 많이 구해서 보라. 전체 맥락을 보면 절대로 인종차별적이지는 않다. 샤를리의 풍자와 조롱은 원래부터 교황, 랍비 등 모든 종교가 대상이었다. 최근 덴마크 잡지와 관련된 이유로 이슬람 예언자 마호메트를 다루는 빈도수가 높아졌을 뿐이다. 굳이 규정하자면 샤를리는 세속주의적이었으며 종교의 근본주의 성향에 적대적이었다. 변화를 위해서는 모든 권위에 도전하려는 ‘뼛속까지’ 좌파였으며, 그러한 권위를 성역화하려는 모든 체제에 반대하다 보니 모든 제도권 종교가 대상이 되었다. 이런 내용은 만화라는 형식과도 불가분의 관계였다. 샤를리가 행한, 권위에 대한 무책임하고 전방위적인 공격의 결은 미국에서 가장 추앙받던 목사가 어머니와의 성교를 고백하는 가상인터뷰를 게재한 래리 플린트의 그것과 닮아 있다. 물론 마호메트가 모든 무슬림들에 대해 갖는 상징성이 있지만 마호메트를 조롱했다고 해서 무슬림 혐오라고 한다면 김일성·김정일에 대해 칭찬 한마디 했다고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예술로서 권위를 공격하는 시도들은 무슬림들 스스로도 이슬람 율법이나 체제를 겨냥해서 많이 하고 있다. 이는 최근 영화 <쿼바디스>처럼 기독교 내부에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시도와 다를 바 없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소수자 인권헌장 거부에서처럼 이런 논란에서는 근본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지만 샤를리 테러에 대해선 프랑스뿐 아니라 전세계의 수많은 무슬림들이 단호하게 비난하고 있다.
샤를리가 만평을 게재할 표현의 자유는, 자신들의 나라를 개혁하고자 하는 무슬림들을 위해서라도 보호되어야 한다. 이번 사태의 저변엔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종교적 성역을 지키려는 자들이 종교가 더 인간 중심이 되길 바라는 자들에게 가한 응징이 있었을 뿐이다.
물론 많은 이들이 “나는 샤를리다”라는 구호를 반대편의 폭력주의자들이 보복의 근거로 남용할 우려 때문에 “샤를리가 아님”을 선언하고 있다. 최대의 남용 사례가 바로 9·11을 빌미로 근거도 없이 전쟁을 일으킨 부시나, 가자를 맹폭하고도 샤를리 시위에 참여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다. 하지만 이들을 제어할 동력 역시 내부에서 올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권력에 대한 고발과 비판의 자유는 더욱 필요하다. 그 방식이 누군가에게는 불쾌할지라도.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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