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시작되는 입춘이다. “입춘 추위는 꿔다 해도 한다”는 옛말이 있지만, 올핸 매운 추위 없이 사뿐히 지나갔으면 싶다. 겨우내 추운 사람들이 너무 많았잖은가. 이런저런 사람살이 속내를 생각하다 문득 봄동에 입맛이 쏠려 시장으로 향한다. 아직 추운 날씨인데 할머니들이 재래시장 좌판에서 도란도란한다. 단돈 이천원에 봄동 한 바구니가 실하게 담긴다. 노지에서 겨울을 보낸 배추인 봄동을 울 엄마는 봄똥이라 부른다. 나도 봄똥이라 부른다. 봄을 동하게 하는 봄동은 봄똥이라 불러야 제맛! 추운 겨울을 견디느라 결구를 맺지 못한 봄동을 물에 씻고 손질하다 보면 결구를 맺지 못한 게 아니라 맺지 않은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파리를 씻으며 만져지는 촉감에서 이 배추가 겨우내 퍽 자유를 즐겼다는 느낌이 드는 탓이다. 질기고 푸르른 억센 야성이 고스란하다. 배추란 게 사람 먹자고 기르는 푸성귀라고 생각하지만, 본래 사람 먹으라고 길러지는 운명 같은 건 없다는 듯이, 식물 특유의 거칠고 질긴 생명력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결구를 맺으며 자라는 일반 포기배추가 정착민의 느낌이라면 봄동은 유목민 같다. 스스로 자기 몸에 저축한 야성의 에너지로 당차고 분방하다. 자기 자라고 싶은 대로 맘껏 잎을 퍼뜨린 채 눈도 비도 서리도 맞으면서, 일견 시련이라 할 그 조건들을 마치 즐기기라도 하듯이, 겨우내 더욱 푸르러진 자유! 이름도 어여쁜 봄동, 봄똥. 그 단맛, 고소함, 질김, 거침이 겨우내 쇠잔해진 내게는 두루 약이다.
김선우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