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생’
[2030 잠금해제]
‘미생’은 여전히 화제다. 직장이란 곳이 주는 고단함이 미생을 회자하게 하나 보다. 예전 직장생활을 더듬어보면 사람들이 점심시간에 하는 이야기는 주로 3가지. 연예 가십, 창업 아이템, 로또. “내가 갑자기 안 나오면 당첨된 줄 알아.” 로또에 당첨되건 창업 성공을 하건 어찌됐든 결론은 직장을 떠나는 것. 사람들의 욕망은 깔때기에 쏟아부은 듯 ‘퇴사’로 향했다.
그럴 때면 노동은 프로메테우스에게 가해진 형벌과도 같아 보였다. 형벌을 피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인 창업 아이템과 로또 자리를 주식이나 부동산 등이 대신하기도 한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재벌 3세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월급에 목맬 이유를 사라지게 하는 마술. 그러나 현실 속 재벌 3세는 땅콩 때문에 항공기나 돌리고, 로또 1등 당첨 확률은 벼락맞을 가능성보다 8배나 낮으며, 100명 중 85명의 창업자가 폐업한다. 그래서?
그래서 오늘은 낡은 이야기를 하려 한다. 17세기부터 행해지던, 우리를 형벌에서 구할 구식의 방법을.
요즘 현대중공업 앞에 가면 “일반직 노동조합 홍보물 받아 가세요” 외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노동조합 조끼를 입고 있으나 어색한 티가 폴폴 난다. 노동조합을 만든 지 일주일 됐다. 대기업 화이트칼라 삶을 유지해온 이들에게 노동조합이란 제어하고 막을 때나 익숙한 존재였다. 노동조합 선전전을 방해하려 ‘안전운전’ ‘자연보호’라 적힌 피켓을 들고 억지 캠페인을 하던 이들이었다. ‘현대중공업 무분규 노사상생’ 같은 제목의 보도자료를 언론사에 보낸 것도 이들이다. 관리직 업무 중 하나였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현대중공업이 과장급 이상 일반직 1500명을 희망퇴직 시키겠다고 발표했다. ‘희망’ 자를 앞에 붙여도 엄연히 정리해고다. 갚아야 할 대출금도 키워야 할 아이들도 있는데 순순히 회사를 나갈 순 없었다. 결정적 순간이 오자, 이들은 자신을 지킬 수단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가십으로 도피하는 일도, 창업을 꿈꾸는 일도 무의미했다. 노동조합을 찾았다.
노동조합이 생기면 달라지나? 한 청소노동자에게 무엇이 달라졌냐고 물은 적 있다. 전에는 관리반장에게 퇴근인사를 하러 가는 길목에서 음담패설을 던지는 남성 관리자들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노동조합이 생긴 다음날, 남자들이 길목에서 사라졌다. 몇달 뒤 단체협약을 맺어 퇴근할 때 반장에게 인사하러 가는 일 자체를 없앴다. 노동조합은 노동자 권익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그 최소한의 장치가 임금과 복지를 넘어 삶의 질까지 바꾼다.
결론은 노동조합이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것이 머뭇거려진다. 결론은 단순하나, 현실은 간명하지 못한 까닭이다. 노동조합을 만들어 단체교섭을 요구한 대가로 에스케이(SK)브로드밴드, 엘지(LG)유플러스 통신기사들이 전광판 위에 올랐다. 그곳에서 농성을 한다. 어젯밤 서울 기온이 영하 12도였다. 대기업이 앞장서 무노조를 자랑하는 사회. 노동조합원이라는 이유로 감시, 부당전출, 왕따를 당했다는 기사가 무심히 보도되는 사회. 법으로 보장된 단체를 만든 대가가 가혹하다.
통신기사들이 단체협약을 통해 얻고자 한 것은 일정 정도의 임금인상과 주6일 근무, 4대 보험, 이 정도일 테다. 당연한 것을 얻기 위해 집을 떠나 고공에 올라야 한다. 이건 아니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 그 당연한 것, 얻어야겠다. 누군가 어떤 고통을 지게 될지 겁이 덜컥 나지만, 그럼에도 대안은 노동조합이라 말해야겠다.
희정 기록노동자
희정 기록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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