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을 공부하러 미국에 온 2000년만 해도 한국의 영화문화는 그저 그랬다. 한국 영화계는 스크린쿼터 축소라는 위기를 맞고 있었고, 1999년 한국 영화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36.1%였다. 그것도 93년 15.3%라는 최저점을 찍은 뒤 이룩한 비약적 성장이라고 놀라워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함께 공부한 영화학교 학생들 가운데 한국 영화를 보았거나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새천년 들어 한국 영화의 성장은 놀랍도록 가팔랐고, 나는 그 과정을 한국 바깥, 그것도 할리우드 주변에서 낱낱이 목격했다. 학위 논문을 쓰자마자 곧바로 영화학교 교수로 임용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한국 영화에 대한 미국 대학들의 관심이 크게 는 덕분이다. 한국 감독들이 칸, 베를린, 베네치아(베니스) 등의 영화제를 휘저었고, 그와 함께 한국 영화의 국내 시장 점유율도 크게 올랐다. 2003년 뒤로는 평균 50%를 훨씬 웃돈다. “21세기에 부상한 최고의 비할리우드 영화”라는 찬사를 들으며 한국은 자국 영화가 할리우드 대작을 비롯한 해외 수입영화들을 제치는 몇 안 되는 나라가 되었다. 이제 미국에서 한국 영화 한 편 보지 않았거나 들어보지 않은 영화인이나 영화학자는 거의 없다.
한국 영화의 성공이 특히 주목받는 것은 쿵후 영화나 사무라이 영화 같은 특정 장르를 통해 서양에 소개된 홍콩과 일본, 대중성이 약한 예술영화로 세계 무대에 등장한 중국·대만과 달리 상업영화, 예술영화, 다큐멘터리, 저예산 독립영화 등 영화의 전 분야에 걸쳐 수준 높은 작품들을 내놓는 다양성 때문이다. 영국의 아시아영화학자 크리스 베리 교수(런던 킹스칼리지)는 한국 영화의 특징을 “풀서비스 시네마”라고 표현한 바 있다. 풀서비스는 활발한 영화제작은 물론, 다양한 상영프로그램으로 영화문화를 풍부하게 해주는 국제영화제들과 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등의 활동도 포함한다. 좋은 영화를 많이 봐야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
한국 영화의 도약은 96년의 두 가지 ‘사건’에 빚진 바가 크다. 하나는 헌법재판소가 사전심의를 위헌이라 결정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산영화제가 한국 최초의 국제영화제로 출범한 것이다. 검열 철폐가 영화인들에게 비로소 ‘민주주의의 꽃’인 표현의 자유를 누리게 했고, 부산영화제는 세계 유수 영화제들과 돈독한 네트워크를 형성해 한국 감독들과 영화가 세계 무대에 소개될 수 있는 발판 구실을 했다. 부산영화제가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로 평가받는 데는 출범 이래 지금까지 집행위원장과 수석프로그래머를 포함한 주요 책임자들이 바뀌지 않고 꾸준히 세계 영화인과 교류하며 쌓은 전문성 덕이 크다.(지난해 84살로 퇴임한 질 자코브 칸영화제 전 집행위원장은 37년간 복무했다!) 1968년 2월 프랑스 정부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창립자인 앙리 랑글루아를 일방적으로 해임했을 때 프랑스 감독들은 물론 전세계 유명 영화인들이 들고일어나 시네마테크 보이콧을 외쳤다. 결국 랑글루아는 영화인들의 연대에 힘입어 복귀했다.
내가 일하고 있는 채프먼대는 2009년부터 부산에서 상영된 아시아 영화들 중 골라 소개하는 부산웨스트영화제를 격년으로 열어왔고, 매년 10여명의 영화 전공 학생들을 부산영화제에 견학 보낸다. 부산영화제가 아시아 영화의 최신 흐름을 알 수 있는 최고의 영화제라는 뜻이다. 최근 접한 부산시의 이용관 집행위원장 사퇴 압력, 영화진흥위원회의 영화제 상영작에 대한 등급분류 면제 조항 개정 움직임 등의 소식에 가슴이 철렁했다. 1960년대 황금시대를 누렸던 한국 영화가 70, 80년대에 크게 쇠락한 것은 검열 때문이었다. 40년 만에 재건한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가 문화에 대한 정치인들의 간섭으로 훼손되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부산영화제 관련 뉴스를 접한 동료 교수가 “한국이 민주사회 아니었느냐?”고 물었을 때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남 미국 채프먼대 교수·영화학
이남 미국 채프먼대 교수·영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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