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고등학교의 강당에 들어서는데 이런 표어가 눈에 띄었다. “나라의 동량이 되자.” 헉. 나는 멈칫하며 7, 80년대 국민교육헌장을 외던 때가 떠올랐다. 물리적 시간은 한 세대 훌쩍 넘게 흘렀으나 ‘정말 그때로부터 얼마나 나아진 걸까’ 싶은 순간들이 있다. 기둥과 들보를 아울러 이르는 말인 동량은 흔히 나라나 집안을 이끌어 갈 젊은이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그날 나는 학생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라를 위한 동량’이라든지 ‘최고가 되라’는 주문에 대해 ‘노!’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성취할 가치가 있는 ‘최고의 상태’란 사회가 일률적으로 제시하는 피라미드의 최상층이 아니라, 개개인에 따라 모두 다른 ‘최적한 행복의 상태’여야 한다. 모두가 동량이 될 필요는 단연코 없다.
동학사 법회에서 노스님이 말했다. “여러분들은 모두 열심히 공부해 큰 나무가 되어라. 큰 나무가 되면 법당의 대들보가 되느니라. 큰 그릇이 되어라. 큰 그릇이 되면 만가지를 다 포용할 수 있느니라.” 그런데 경허선사가 우연히 그 자리에 들렀다가 이런 일갈을 한다. “큰 나무는 크게 쓰일 데가 있고 작은 나무는 작게 쓰일 데가 있다. 좋은 것은 좋은 대로 굽은 것은 굽은 대로 잘 사용하면 된다. 이것은 좋고 이것은 나쁘다는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 얘들아, 중요한 것은 ‘최적’의 상태를 찾아가는 것이다. 외부에서 주어진 최고가 아니라 내가 정하는 최적 말이다.
김선우 시인·소설가
김선우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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