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가 긴 사람과 짧은 사람은 보폭이 다른 게 당연하다. 둘에게 같은 보폭을 요구하는 것은 각각의 신체에 대한 억압이다. 그럼에도 근대국가의 군대는 다리 길이의 평균치를 추출해서 똑같은 속도와 보폭으로 걷는 표준적 인간을 만들어낸다. 표준화가 곧 효율이라 믿는 근대사회는 개인들의 개성을 억압하여 표준에 수렴시키는 기법을 발전시켜 왔다. 개성에 대한 억압은 극히 사소한 문제로 취급된다.
표준적 인간을 만드는 작업은 학교에서 시작된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아이가 있는 반면 열을 가르쳐도 하나밖에 모르는 아이도 있지만, 근대 학교는 이 차이를 근본 문제로 다루지 않는다. 옛날 학생들은 스승이 “이제 더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할 때나, 본인이 “이제 더 배울 것이 없다”고 느낄 때 학업을 그만두었으나, 근대 이후의 학생들은 본인의 자질과 열의가 어떠하든, 스승의 수준이 어떠하든, 국가가 정해준 기간 동안 학교에서 버티고만 있으면 학업을 마칠 수 있게 되었다. 표준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나가라고 주는 인증서, 즉 졸업장을 주는 곳이 근대 학교다.
우리나라에서 근대 학제는 1895년 2월의 ‘교육입국조서’로 마련되었다. 그전에도 동문학, 육영공원, 배재학당 등의 근대적 학교가 있었으나, 진학 자격증이나 취업 자격증 구실을 하는 졸업장은 이 뒤에 발급되었다.
“공립법률학교 졸업한 김병제가 벼슬 아니 시켜준다고 총리대신과 법부대신에게 상서하되 불경하고 무리한 말이 있기로 내각에서 법부로 조회하여 그 사람을 잡으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도주하였더라.”(<독립신문> 1896년 4월11일치)
120년 전에도 졸업장의 주된 용도는 취업이었다. 그런데 졸업장을 “이제 더 이상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증서로 이해하는 태도는 현대 한국인들에게 유독 심한 듯하다. 한국 성인의 독서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다. 졸업장은 학교가 정한 최저 수준을 넘었다는 증서일 뿐 학업을 전폐해도 좋다는 증서가 아니다.
전우용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