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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28년 된 ‘막내 검사’의 응석 / 박용현

등록 2015-02-10 18:46

세상이 한없이 궁금하고 또한 한없이 두려웠던 대학 1학년, 1987년, 기침과 두근거림으로 가슴이 희뿌옇던 그해 거리와 함성들, 6월, 피고 진 꽃들과 습기 가득했던 대기. ‘민주화운동의 승리’라고 기록된 그 시간은 저 추상적 단어가 다 품지 못하는 고뇌와 방황, 공포와 분노, 연민과 사랑으로 점철된 숱한 개인들의 삶의 한 시기이기도 했다. 한 학년 위였던 하숙집 형은 그 시간 속으로 익사한 경우다. 가난한 시골집 장남으로 제 학업은 물론 집안까지 건사해야 했고 거기에 부모님 기대를 배반하며 학생운동에까지 뛰어들었으니 스무살 젊은이의 정신은 얼마나 부대꼈을까. 그해 어느 날 하숙방 한가운데 서서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기 시작한 그는 여자친구의 손에 이끌려 마음을 치료하는 병원으로 갔다. 그해 경찰은 박종철을 물고문해 죽였고 검찰은 그 진상을 덮었다. 이한열은 최루탄에 맞아 피 흘리며 죽어갔다. 하숙집에는 박종철과 같은 과 동기인 또 다른 형도 살았다. 하숙생끼리 방바닥에 둘러앉아 소주를 마시는 날이면 세상은 스산한 회색빛으로 물들곤 했다.

그해는 박상옥 검사에게도 떨리고 혼란스런 삶의 한 시기였을까. 박종철 사건 수사팀의 말석 검사였던 그는 검찰 수뇌부의 사건 축소·은폐에 침묵으로 따랐다. 28년 뒤, 정의와 인권의 최후 보루인 대법관이 되겠다는 그에게 사람들은 그때 왜 그리 비겁했느냐고 묻고 있다. 어떤 이들은 ‘막내 검사’라서 어쩔 수 없었다고 방어막을 쳐준다. 소년 티를 갓 벗은 스물한두살의 젊은이들도 정의의 명령을 따르느라 버거운 짐을 짊어지고 목숨까지 내놓던 시절에, 31살의 임관 4년차 검사가 막내라는 이름 뒤로 숨어들었다니. 그것도 87년 민주화의 기폭제가 됐을 만큼 장삼이사 모두가 공분한 고문치사라는 중범죄의 진실을 저버리고.

검사란 모름지기 범죄를 밝혀 심판대에 올리는 권한을 독점하는 자, 그래서 정의의 실현을 의무로 짊어진 자가 아닌가. 세월호 진상조사위원회에 기소권을 주자는 유족들의 요구에 ‘사법체계를 흔든다’며 아연실색할 만큼 검찰의 기소독점이 신성한 것이라면, 그 권한을 저버리지 않을 의무 또한 신성한 게 아니던가. 검사동일체라는 가부장적 통제 탓에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는 대지 말자. ‘검사는 상사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우악스런 검찰청법 규정이 지배하던 시대였다지만, 검찰이 조폭도 아닌 다음에야 당부당을 가리지 않는 무조건 복종은 말이 되지 않는다. 부당한 명령을 내리는 상관을 들이받는 기개 또한 검사의 낭만적 권리이자 법철학적 의무였다. 지금도 상명하복의 규율은 살아있지만, 국가정보원의 2012년 대선 부정선거 공작을 수사한 검사들은 윗선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사생활이 들춰져 쫓겨나고, 항명하다 좌천당하고, 승진에서 탈락해 옷을 벗을지언정 진실을 밝히려 했다. 광우병 파동을 보도한 <피디수첩>을 처벌하라는 지휘부 방침에 반발해 사표를 던진 임수빈 부장검사도 그랬다. 오래전 “우리는 개다. 물라면 물고, 물지 말라면 안 문다”고 털어놓은 검사는 항명은 못할지언정 그 빈자리를 고뇌로라도 채웠다.

박용현 논설위원
박용현 논설위원
검사로서 평생 반성해야 할 일을 은근슬쩍 없던 듯이 감추고 대법관 인사청문회에 서려 한 박상옥 검사는 28년이 지나도록 응석받이 버릇을 고치지 못한 것 같다. 그런 인물을 대법관 후보랍시고 임명제청해놓고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대법원장의 응석도 차마 못 봐줄 일이다. 23살에 죽은 ‘막내’ 박종철은 어떤 세상을 꿈꾸었던가. 역사든 정의든 돌아보지 않고 입신만 좇는 덜떨어진 어른들이 지배하는 세상, 28년 전과 변함없는 그 세상이 다시 두려워진다.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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