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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선우의 빨강] 텅 빈 말들의 무덤

등록 2015-02-10 18:48


김선우 시인·소설가
김선우 시인·소설가
여기는 말들의 무덤. 텅 빈 말들이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이 무덤의 권력자는 ‘보수’와 ‘진보’라는 말. 이미 죽은, 피도 살도 뼈도 숨결도 없는 말. 그런데도 이 유령의 말들이 여전히 대형 깃발 휘날리고 깃발 아래 줄선 사람들은 악다구니 써가며 서로 할퀸다. 이 나라 정치판 어디에 진보가 있고 보수가 있나.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며 새로 선출된 야당 대표가 가장 먼저 독재자 묘소에 참배하는 그로테스크한 광경. ‘민주주의’도 ‘독재’도 텅 빈 유령의 말이 된 무덤 속 무덤. 그들의 행동이 그들의 진심이다. ‘조세저항’이라는 말을 하지만 ‘저항’이라는 말 역시 텅 비긴 마찬가지. 불만을 터뜨릴 뿐 아직 우리는 저항의 감각을 갖지 못했다. 지금은 민중, 국민, 시민이란 말 역시 비어 있다. “세상에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우리 자신밖에 없다”는 옛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는지도 모른다. 한방울씩 떨어지다 바위를 뚫는 낙수처럼, 비등점을 향해 차곡차곡 끓어오르는 물처럼, 불만이라는 형태로 바닥에서 무언가 무르익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떼 지어 몰려다니는 말일수록 텅 비어 황폐하니, 우리는 다만 한방울씩의 물방울로 온 힘을 다해 뛰어내리는 중인지도….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 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 같고/ 혁명 같고/ 먼저 떨어져 내린 큰 바위 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고” 김수영의 ‘꽃잎 1’을 중얼거리며 무덤 속 새날을 맞는다.

김선우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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