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옥 평화협력원 부원장·원광대 초빙교수
“날로 먹으려 하잖아요.” 1월2일 청와대 신년하례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비대위원장에게 한 말이다. 문 위원장의 “집권 3년차에 동력을 가지려면 전면적 인적 쇄신과 내각 개편을 하세요”라는 말에 대통령은 귀를 쫑긋했으나,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금강산을 풀면 덤으로 경제까지 풀리고 외교까지 풀립니다”라는 말에는 “날로 먹으려 하잖아요”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필자는 박 대통령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두 가지 측면에서 의아했다. 첫째, ‘통일은 대박’이란 말이 지금은 귀에 익지만, 처음에는 생경했다. 박 대통령은 젊은이들과 소통하고, 국민이 친밀함을 느끼도록 ‘대박’ ‘짱’ 같은 표현을 즐겨 쓰는지는 몰라도 일반적인 사람들이 잘 쓰는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속어는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함축해서 확실하게 전달한다. ‘날로 먹으려 한다’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국가 최고지도자의 어휘로는 적절치 않지만, 이 표현 속에는 박 대통령의 대북관이 녹아 있다. 불쑥 던진 말에서 박 대통령의 본심이 드러나고 말았다.
두 번째 의구심은 북한을 ‘날로 먹으려’ 하는 집단으로 보면서, 무슨 생각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그 많은 대북 구상과 제안을 쏟아 냈을까 하는 점이다. 유난히 북한의 ‘진정성’과 ‘선행동’을 요구해 온 박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케 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이 북한을 ‘날로 먹으려’ 하는 집단이라 생각한다면, 우리는 북한을 날로 먹으려 한 적은 없었는지 한 번쯤은 생각해 봐야 한다.
북한은 작년 2월 이산가족 상봉을 남쪽이 날로 먹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산가족 문제가 기본적으로는 인도주의 문제지만, 북한에는 정치적 부담이 큰 문제다. 상봉장은 남북의 생활 형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이다. 북쪽 가족들의 행색을 보면서 우리는 안쓰러움과 동시에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을 생각하면서 자긍심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작년에 이산가족 상봉에 호응해온 것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등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과는 다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대북 인도적 지원을 하겠다는 말을 믿고 이산가족 상봉이 끝나고 나면 ‘뭔가’ 있을 것이라 기대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정부차원이건 민간차원이건 대북 인도적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금년에 설 상봉을 제안했는데도 북한의 반응이 없는 것은 작년의 학습효과 때문이다. 대북전단 살포 문제도 마찬가지다. 체제 부담 때문에 북한이 간절히 요구하는데도 남측은 핑계를 대면서, 고위급 접촉에 나오라고 촉구만 한다. 북한으로서는 우리 정부가 고위급 접촉을 날로 먹으려 한다고 볼 것이다.
통일대박, 통일준비, 통일기반 조성 같은 말들도, 북한이 보기에는 자기네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남쪽이 일방적으로 하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북한이 “이것이 우리를 날로 먹겠다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라고 항변하면 뭐라 말할 것인가? 드레스덴 선언도 내용상으로는 우리가 북한에 먹을 것도 주고 산림녹화도 해주겠다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북한 당국의 참여 같은 건 고려되지 않은 논리구조를 갖고 있다. 북한이 박 대통령의 대북 구상과 제안에 반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대로 간다면 ‘분단 70년, 광복 70년’을 계기로 남북 간에 뭔가 해보려는 박근혜 정부의 구상은 반쪽짜리 행사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과 정부는 ‘날로 먹으려 한다’는 식의 대북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역지사지 입장에서, 그리고 선공후득의 자세로 남북관계를 선도해 나갔으면 한다. 우리가 북한보다 여러 면에서 우위에 있다는 자신감은 남북관계 개선을 선도할 여유와 확실성을 보장한다.
황재옥 평화협력원 부원장·원광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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