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문화부장
얼마 전 두 아이의 졸업식에 연 이틀 갔다가 새삼 깨달았다. 우리 세대라면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로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던 ‘국기에 대한 맹세’가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로 바뀌어 있었다. 찾아보니 2007년부터였단다. 선생님 앞에 일렬로 서서 국민교육헌장을 끝까지 외워야 자리에 돌아가던 세대에겐, ‘몸과 마음을 바쳐’가 사라지고 자유와 정의라는 단어가 들어간 게 꽤 큰 변화로 다가왔다. 대통령은 부부싸움 중 국기하강식에 벌떡 일어나는 영화 장면을 얘기하지만, 시대는 분명, 변했다.
그런데…. 진짜 변했나? 연초부터 문화판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시대를 짐작하기 어렵게 한다.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위원장에 대한 서병수 부산시장의 사퇴압박 논란, 영화진흥위원회의 영화제 사전심의 도입과 예술영화 전용관 지원방식 변경 움직임 등 일련의 사태에 영화계는 “표현의 자유를 훼손 말라”며 10년 만에 집단행동에 나섰다. 재미동포 신은미씨의 책에 대한 종북몰이와 국무총리의 ‘우수문학도서 사업’ 유감 표명, 신씨 책에 대한 우수문학도서 취소 결정에 이어 문화체육관광부가 세종도서(우수도서)의 문학부문 선정 잣대로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문학’과 ‘국가경쟁력 강화에 기여’를 거론하자 출판인회의와 작가회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급기야 국민권익위원회의 국민신문고에 “청소년 선정도서에서 6·25 남침을 해방전쟁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라는 글 하나가 올라온 지 1주일도 안 돼, 문체부를 통해 이 민원을 넘겨받은 부산시교육청은 <10대와 통하는 한국전쟁 이야기>의 이달의 책 선정을 전격 취소했다. 진보교육감이 있는 교육청조차 보수언론의 이슈화를 두려워해 제대로 된 검증과 분명한 이유도 없이 저지른 일은 우리 사회 퇴행의 불길한 징조로 읽힌다.
무릇 금서의 역사는 독재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로마 아우구스투스 시대는 문화의 전성기라 알려졌지만 그는 대량의 ‘분서’를 지시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미국의 헬렌 켈러를 분노케 해 <뉴욕 타임스>에 공개편지를 쓰도록 했던 것은 1933년 나치 독일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분서 사건이었다.
이런 고전적인 금서는 아니지만, 선정 취소 등을 통해 ‘심리적 금서’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은 ‘신 금서의 시대’라 불릴 만하다. 세종도서의 ‘특정 이념’ ‘국가경쟁력’ 운운이나, 영진위가 인정한 예술영화 26편만 일정기간 상영해야 지원을 해주겠다는 것도 특정한 성향의 콘텐츠는 ‘배제’하겠다는 표현이나 다름없다. <10대와…>에 대해 이념공세를 펼친 보수언론에 대응을 선언한 이 책 출판사 관계자는 “솔직히 이러면 부산 나아가 다른 지역 도서관에서 우리 책을 구입하겠나 싶다. 하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다신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에 나섰다”고 말했다.
1968년부터 시작된 세종도서 사업에 대해선 이참에 정부가 직접 책을 구매하는 지원이 적절한지 근본적으로 토론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출판사에 ‘닭 모이’ 주듯 하는 지원보다, 도서관의 책 구입비를 늘리고 사서들의 도서선택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부가 노골적으로 문화콘텐츠에 ‘잣대’를 정한다면 그 어떤 논의도 무의미하다.
2년 전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야인’이던 유진룡 문체부 전 장관에게 임명 뜻을 밝히는 전화를 걸어 두 가지를 말했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견해가 다른 사람들, 그런 문화예술인들을 안고 가야 한다’는 것과 ‘우리 사회의 정신적 기반이 척박하다’는 것. “문체부가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으세요?” 그 발언과 거꾸로 돌아가는 지금의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김영희 문화부장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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