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군대 생활을 모두 충청도에서 했다.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신병교육, 대전 육군통신학교에서 후반기교육을 받은 뒤, 충북 충주에 있는 부대에 자대배치됐다. 당시 향토사단 예하인 충주 부대에는 나 같은 현역병보다 방위병(정식 명칭은 단기사병)이 훨씬 많았다. 방위병들은 충주와 그 주변 지역 출신이었다.
충청도 사람들과 지내보니 듣던 대로 ‘양반’이었다. 대부분 예의 바르고 푸근했다. 하지만 충청도 사람들의 모호한 말투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다. 나는 직설적 말투가 익숙한 경상도 출신이다. 하루는 같이 일하던 방위병에게 업무 지시를 하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됐시유”라고 말했다. 당시 나는 이를 ‘오케이’(OK)로 잘못 알아들었다. 몇차례 시행착오를 겪으며 이런 경우 ‘됐시유’가 완곡한 부정의 뜻이란 것을 뒤늦게 알았다.
같은 말을 해도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특유의 말투처럼 충청도 사람들은 속마음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충청도 사람들이 요즘 공공연히 ‘영충호 시대’란 말을 쓴다. 영충호(嶺忠湖)는 영랑호(강원도 속초)나 충주호 같은 호수 이름이 아니다. 영충호의 영은 영남, 충은 충청, 호는 호남의 첫 글자다.
2013년 5월 충청권 인구(525만136명)가 호남권(524만9728명)보다 408명이 많아졌다. 1925년 인구 통계가 시작된 이후 88년 만에 처음이다. 이때부터 이시종 충북지사가 영충호란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인구 규모 등을 고려해 ‘영호남’이 아니라 ‘영충호’(영남·충청·호남)로 불러달라는 것이다.
지난해 충청권 인구(532만9140명)는 호남권 인구(525만3224명)보다 7만5916명이 더 많았다. 시간이 갈수록 충청권과 호남권 인구 격차는 커질 것 같다. 통계청의 장래 인구 추계(2010~2040)를 보면, 2020년 충청권과 호남권 인구 격차는 41만명(충청 546만명, 호남 505만명), 2030년 65만명(충청 567만명, 호남권 502만명), 2040년 77만명(충청 568만명, 호남 491만명)으로 벌어진다. 충청권 인구가 꾸준히 느는 것은 천안·아산 지역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서산·태안·당진 지역의 제철, 세종시 출범 등에 힘입었다는 분석이 많다.
투표로 정치적 의사 결정을 하는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인구는 유권자다. 앞으로 충청도의 정치적 위상이 커질 것이다. 그동안 정치 구도에서 충청도는 ‘핫바지’(어리석은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무시당하거나 영호남 대결 구도에서 캐스팅보트 구실에 머물렀다. 영충호란 말에는 지역 구도의 양대 산맥인 영호남의 그늘에서 무기력했던 충청의 자존심을 찾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담겨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지역 자존심과 지역 이기주의가 동전의 앞뒤처럼 붙어 있다. 최근 이완구 총리 인준 과정에서 충청 지역주의 논란이 일었다. 새누리당 대전시당이 지난달 이완구 의원(부여·청양)의 국무총리 내정에 대해 축하 성명을 내어 “영충호 시대의 본격 개막을 알리는 축포로 받아들인다”고 평가했다. 이달 초중순 이완구 총리 인준을 전후해 충청 지역 언론에서는 이제는 충청권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는 ‘충청 대망론’을 거론하는 외부 기고나 기사가 실리곤 했다.
나는 영충호 시대에 걸맞게 충청권이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충청도가 사람이 많아졌다고 우쭐대는 인구 서열주의나 지역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충호 시대의 진정한 의미는 충청이 나서서 영남과 호남, 나아가 대한민국을 융합·화합시킨다는 ‘충화영호’(忠和嶺湖)를 의미한다고, 이시종 충북지사가 지난해 신년 화두에서 밝힌 바 있다.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nura@hani.co.kr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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