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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오버하지 마세요” / 황준범

등록 2015-03-10 18:50수정 2015-03-10 21:56

박근혜 대통령의 2006년 5월20일 신촌 피습 사건 때를 떠올려 본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를 위로하며 박 대통령이 “어쩜 그렇게 비슷한 점이 많은지”라고 말한 그 사건 말이다. 5·31 지방선거 지원유세 도중 얼굴에 칼을 맞은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스스로 지혈하며 “많이 놀라셨죠. 저는 괜찮아요”라고 주변을 안심시켰다. 수술을 받은 뒤에도 “큰일 날 뻔했어요”라고 남의 일처럼 말했다. 병상에서 깨어나 던졌다는 “대전은요?” 발언은 정치사에 전설처럼 전해진다. 이번에 똑같이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병원에 들어서며 “저는 괜찮아요. 여러분, 걱정 마세요”라고 말하고, 병상에서 한글로 “같이 갑시다”라는 트위트를 올린 리퍼트 대사와 기막히게 닮았다. 리퍼트 대사가 ‘대인배’ 소리를 듣듯, 박 대통령은 그때 ‘도인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박 대통령이 보였던 의연함의 절정은 따로 있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한나라당은 “정치적 테러이며 조직적·계획적 범행”이라고 규정하고 진상조사단까지 꾸려 선거전에 대대적으로 활용하려 했다. 그때 박 대통령은 의원들에게 “(당에서) 정치적으로 오버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당부했다. 한나라당은 그 선거에서 16개 시도지사 가운데 12곳을 건지고 기초단체장은 물론 광역 비례대표 득표율에서도 지방선거 사상 최고치를 보이며 압승했다. 박 대통령은 누구도 넘보기 힘든 대선 주자 1위 자리를 굳혔다.

‘오버하지 말았으면….’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을 처음 접하고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대해 개인적으로 든 생각이기도 하다. 아니, ‘설마 이번에도 ‘종북몰이’로 끌고 가진 않겠지’라고 기대 섞인 예측까지 해봤다. 사건 당일 김무성 대표와 박 대통령이 잇따라 “한-미 동맹에 대한 테러”, “한-미 동맹에 대한 공격”이라고 규정했을 때만 해도, 사안이 중대한데다 발생 직후인 만큼 수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측은 빗나갔다. 이튿날 여당 대표·원내대표, 국무총리, 청와대 비서실장은 고위급 회의를 열어 이번 일을 “종북세력에 의한 사건”이라고 못박았다. 이후는 마치 이런 유의 사건에 ‘대응 매뉴얼’이라도 있는 듯한 진행이다. 100여명의 검경 특별수사팀이 꾸려지고, 여당 대변인은 야당을 향해 “종북 숙주에 대한 참회록을 써야 할 때”라고 관용구를 꺼내들었다. 이어 여당 지도부는 테러방지법 제정과 사드(THAAD·종말단계 고고도 미사일방어 체계) 도입 주장까지 이 사건에 얹었다. 김기종에 대한 대중의 판단이 일정하게 수렴되는 상황에도 아랑곳없다. 미국은 ‘개인의 무분별한 폭력’이라는데, 청와대와 여당은 ‘한-미 동맹에 대한 종북세력의 테러’라고 한다.

수년간 새누리당을 가까이서 지켜봐 온 기자로서, 주변에 “새누리당 많이 변했다”고 긍정적 측면을 말하는 편이다. 하지만 북한이나 진보단체, 그 언저리에만 닿아도 화들짝 끓어오르는 새누리당의 모습을 보노라면,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새누리 디엔에이’가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기대하며 바라보는 의원들마저도 이 사건에 “종북 좌파 세력”을 주저 없이 입에 올리는 걸 목격하고 ‘역시나’ 한다.

황준범 정치부 기자
황준범 정치부 기자
개인적 실망이야 그렇다 치자. 하지만 이번 일을 대하는 집권세력의 태도에서, 국민의 안전과 대외 관계를 책임지는 묵직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 점은 안타깝다. 한국은 수도 서울에서 외국사절을 겨냥한 테러가 벌어질 위험이 만연한 나라인가? 한국은 제1야당이 ‘종북세력’에게 생명력의 토양을 제공하고 있는 나라인가? 이렇게 비쳐도 괜찮은 건가? 이 사건으로 갈등과 분열을 키우는 것은 이른바 ‘종북세력’인가, 집권세력인가? 지금, 오버하고 있지 않나?

황준범 정치부 기자 jay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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