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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한국 야구의 이방인 / 이춘재

등록 2015-03-16 18:35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1956년 여름, 기름 냄새 가득한 화물선에 몸을 싣고 대한해협을 건넌 이들이 있었다.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선진 야구’를 전해주러 온 16명의 재일동포 고교 야구 선수들이었다. 그들이 당시 한국 야구에 준 충격은 대단했다. 낙차 큰 커브와 호쾌한 장타력, 빨랫줄 같은 송구는 그야말로 말로만 듣던 것이었다. 장비는 더 놀라웠다. 천막을 찢어서 만든 야구장갑과 잡목을 대충 깎아서 만든 방망이를 휘두르던 국내 선수들은 일제 ‘신상’에 넋이 나갔다. 재일동포 선수들은 시합을 마친 뒤 자신의 손때 묻은 장비를 전부 남기고 떠났다. 그들이 남긴 선물은 국내에서 제대로 된 글러브와 배트가 생산되는 계기가 됐다.

19일 개봉하는 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은 한국 야구의 뿌리를 좇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원로 야구인들은 ‘1960년대 한국 야구의 도약은 재일동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입을 모은다. “미국은 너무 멀었고, 일본은 철천지원수였다. 선진 야구를 배울 수 있는 길은 재일동포밖에 없었다.” 일본 프로야구를 호령한 장훈과 ‘야신’ 김성근 한화 감독이 당시 모국방문단에 끼여 있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한국 야구는 1963년 일본을 제치고 아시아 정상에 오른다. 미국 선교사 질레트로부터 야구를 처음 배운 지 60여년 만의 일이다. 일본은 이미 프로야구가 국민 스포츠로 자리잡은 때였다. 한국 야구의 비약적 발전은 일상에 고단한 국민들에게 큰 위안거리가 됐다.

1956년부터 1997년까지 42년간 모두 620여명의 재일동포 야구인들이 어머니의 나라를 찾았다. 이들을 바라보는 모국의 시선은 어땠을까. 영화를 만든 김명준 감독의 말은 의외다. “60년대까지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지만, 70~80년대는 푸대접을 받았다. 한국 야구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1980년대 방문했던 이들은 몰상식한 관중들로부터 ‘반쪽발이’라는 욕설까지 들어야 했다.

분단의 저주도 있었다. 1957년 제2회 모국방문단의 에이스였던 배수찬(1937~1986)은 59년 한국 대표팀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가 아시아대회 준우승을 차지하며 일본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일본 고교 야구의 유망주였다. 야구 원로들은 “전후 한국 야구의 중심에 배수찬이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공안세력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1960년대 절정을 이룬 재일동포 북송사업으로 그의 어머니가 입북했다. 누나는 재일조선인총연합회(총련)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때마침 터진 1·21사태(김신조 사건)는 공안 광풍에 기름을 부었다. 배수찬은 공안기관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그의 막역한 후배 김성근도 함께 끌려갔다가 하루 만에 풀려났다. 기관원들은 김성근에게 배수찬의 일본 행적을 추궁했으나 문제될 게 없었다. 배수찬은 40여일이 지난 뒤 풀려났지만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다. 대학과 프로팀 코치를 전전하다 1985년 아르헨티나로 이민 갔다. 두 차례 사업 실패 뒤 1986년 일본을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숨졌다. 사인은 급성심장발작으로 기록돼 있지만, 그의 지인들 중엔 그가 자살했다고 믿는 이들도 있다.

이춘재 스포츠부장
이춘재 스포츠부장
‘조센진’과 ‘반쪽발이’ 사이에서 방황하던 그들은 모국의 부름에 기꺼이 응했다. 재일동포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차별이 불 보듯 뻔한데도 말이다. 그들에게 어머니의 나라는 과연 무엇을 해줬는가. 영화는 “이제 와서 재일동포라는 게 밝혀지면 일본에서 살기가 힘들어진다”며 출연을 거부하는 이들의 사연도 전한다. 프로야구 관중 700만 시대를 앞두고 있는 한국 야구의 화려한 오늘은 이들이 없었다면 그만큼 더뎠을 것이다.

이춘재 스포츠부장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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