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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리콴유, 에어컨과 민주주의 / 이강국

등록 2015-03-30 18:56

얼마 전 별세한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성공을 가져다준 한 요인으로 에어컨을 들었다. 그는 총리가 되자마자 공무원들이 일하는 건물에 에어컨을 달았고 그것이 정부의 효율성을 높였다고 말했다. 효율적인 정부를 세워 싱가포르를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로 이끈 리콴유의 실용주의를 잘 보여준다.

싱가포르의 기적도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국가의 적극적인 경제개입이 결합된 실용적 모델 덕분이었다. 싱가포르는 낮은 세금과 경제개방으로 세계의 기업을 끌어들임과 동시에 교육과 산업 발전을 위해 전략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정부가 80% 이상의 국민들에게 공공주택을 제공하며 항공사에서 동물원까지 여러 공기업들을 소유·관리한다. 싱가포르의 경제발전은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에 기초하고 있다. 성장의 이면에서 리콴유는 아시아의 가치와 문화를 강조하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억눌러왔다. 그의 아들이 현재 총리이고 가족들이 국가를 지배하고 있다. 정부에 대한 비판은 금지되어 있고 언론자유도 없는 나라. 덩샤오핑에게 개혁개방의 모델이 되었던 싱가포르는 권위주의에 기초한 번영을 꿈꾸는 중국에 다시 미래의 모델이다.

리콴유 사후 한국에서도 부패를 척결하고 비전을 실천한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높다. 심지어 자유를 유보해서라도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권위주의에 대한 향수마저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과거 싱가포르와 한국은 개도국에서는 독재가 성장에 도움이 되고 민주주의는 사치품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국가들의 역사적 경험을 보면 권위주의가 성장률을 높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적 변화를 고려한 경제학의 최근 실증연구들은 민주주의의 발전이 경제성장을 촉진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또한 여러 학자들은 혁신과 성장의 촉진을 위해 부와 권력의 집중을 막는 민주적이고 포용적인 정치제도와 경제제도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싱가포르는 다른 독재정권들과 달리 청렴하고 발전지향적인 정부의 주도하에 경제성장의 혜택을 모두가 공유하며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최근 싱가포르는 빈부격차와 부의 집중이 심각해져 우려를 던져주고 있다. 나라는 부자인데 많은 노동자들은 가난하여 상대적 빈곤율이 무려 20%를 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부는 공식적 빈곤통계조차 발표하지 않고 있다. 또한 2000년대 이후 소득불평등이 악화되어 2014년 상위 10% 가구의 소득이 하위 10%에 비해 18배나 된다. 그러나 정부의 재분배 기능은 미약하여 가처분소득 기준 지니계수가 0.412로 다른 선진국들보다 훨씬 높다. 인구의 4분의 1이 넘게 늘어나고 있는 열악한 처지의 외국인 노동자들도 갈등의 씨앗이다. 실업보험도 없을 정도로 인색한 싱가포르 정부가 2007년부터 빈곤층을 위한 지출을 늘렸고, 올해 부자들의 최고소득세율을 20%에서 22%로 인상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런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강국 일본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
이강국 일본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
불만과 변화의 기운은 이미 정치에서 나타나고 있다. 여당은 지난 2011년 총선에서 역대 최저인 60%의 득표율을 얻었고 이후 보궐선거에서도 패배했다. 여전히 여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고 정부에 대한 신뢰도 높지만 정치체제가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리콴유 사후, 이러한 변화의 요구는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이제 싱가포르도 사회안전망을 위한 정부의 역할을 강화하고 좀더 평등한 발전모델을 추구해야 할 때다. 지속적 성장을 위해 성장의 과실과 권력을 시민들 모두와 나누는 노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리콴유가 떠난 지금 싱가포르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에어컨이 아니라 더 많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다.

이강국 일본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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