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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마취제

등록 2015-04-06 18:56

‘1950년 10월19일, 환자의 다리 절단 작업을 잘못한 김 일병이 군의관 류 대위의 호된 기합을 받고 있었다. 무릎 아래 중간쯤에 머큐롬으로 표시한 곳을 자르라고 지시했는데 경험 없는 그가 그냥 나무토막 자르듯 절단해 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군의관이 메스로 피부를 5㎝쯤 떠서 걷어올리고 뼈가 하얗게 드러난 부분을 다시 자르라고 지시한다. 수술대 위에 사지를 묶인 환자가 욕설을 퍼부으며 몸부림을 쳐대니 수술대가 들썩거린다. 의무병이 맞고함을 지르며 허리를 묶고 머리를 잡았다. 수술부 선임하사관이 자르고 피부를 내려 봉합하니 수술은 끝났으나 환자는 여전히 땀을 뻘뻘 흘리며 “내 다리 내놓아라” 울부짖고 있었다.’(박남식, <실낙원의 비극> 중)

한국전쟁 중 의무병이었던 사람의 회고다. 당시 미군 군의관들은 한국군 동업자들을 ‘절단의 천재’라 불렀는데, 천재라는 단어의 어감과는 달리 칭찬이 아니었다. 한국군 군의관들은 복합골절, 동상 등을 고민할 여지 없는 절단 수술 대상으로 취급했고, 대개는 마취도 하지 않고 바로 잘랐다. 그들도 마취술을 알기는 했으나 어느 분야에서든 아는 것과 하는 것은 다른 법이다.

외과 수술에서 처음 에테르를 사용하여 환자를 미리 기절시키는 방법이 공개 시연된 것은 1846년이었고, 이를 마취(anesthesia)라 명명한 이는 미국의 의사이자 문필가인 올리버 홈스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884년 일본인 의사에 의해 처음 마취술이 시행되었는데, 이는 최초의 마취 사망 사고로 이어졌다. 한국인들이 현대적 마취술에 익숙해진 데에는 미국과 인도 군의관들의 도움이 컸다. 휴전 무렵에는 마취술에 숙달된 의사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1958년 1월에는 대학병원에 마취과가 생겼다.

현대인들은 마취 덕에 옛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견뎌야 했던 극한의 고통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꼭 필요하지 않은 수술을 자진해서 받는 사람이 늘어난 데에도 마취가 기여한 바 크다. 그런데 마취가 고통을 느끼는 감각을 둔화시킨 때문인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도 더불어 줄어든 듯하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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