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전축

등록 2015-04-20 18:55


새나 개 같은 동물들도 소리의 고저장단강약으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인류에게도 말에 앞서 노래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인류는 그릇을 만들기 훨씬 전에 악기를 먼저 만들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악기는 최소 3만5000년 전에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새 뼈로 만든 피리다.

인류가 태곳적부터 음악을 즐기기는 했지만, 음악을 듣기 좋아하는 것과 좋은 음악을 듣는 것은 별개다. 근대 이전에는 가장 높은 정밀도를 요하는 기기가 악기였고, 가장 높은 숙련도를 갖춰야 하는 장인이 악공이었다.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목소리를 타고나는 사람도 아주 드물었다. 그러니 정교한 악기와 능숙한 악공, 천부적 명창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그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음악을 듣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최고, 최상의 소리를 동원할 수 있는 권력자 곁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졸렬한 악기 소리와 평범한 목소리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조차 자주 들을 수도 없었다.

1896년 경, 소리를 찍어낸다는 기계를 처음 접한 고종은 장안의 명창 박춘재를 불러 그 기계에 대고 노래를 부르라고 시켰다. 그가 노래를 끝낸 잠시 후 기계에서 그의 소리가 그대로 흘러나오자 고종은 깜짝 놀라며 “춘재야, 네 명이 십년은 감해졌겠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1898년 4월에는 외부 관리들이 이 기계에 명창과 기생들의 노래를 담아 가지고는 삼청동 감은정에 가서 잔치를 벌였다.

유성기 또는 축음기라 불린 이 기계는 1925년 전기 녹음 방식이 개발된 뒤 전축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전축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근자에는 개인용 휴대 기기가 되었다. 현대인은 옛사람들이 평생에 한 번도 듣기 어려웠던 아름답고 조화로운 음악을 매일 수십번씩 듣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정서가 특별히 순화된 것 같지는 않다. 음악으로 다 닦아낼 수 없을 만큼 때가 많이 묻는 삶이어서일까?

전우용 역사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