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심위)가 한국방송의 특집 다큐멘터리 <뿌리깊은 미래>에 중징계인 ‘경고’를 내렸다. “한국전쟁의 발발, 부역자 처벌, 미군의 흥남철수 등 역사적 사실을 다루면서 맥락상 필요한 부분을 생략하거나 특정 장면의 부각, 사실과 다른 내레이션 등으로 왜곡된 역사인식을 조장할 우려가 있는 내용”을 방송하여 방송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뿌리깊은 미래>는 갈등과 혼란을 극복하고 화합과 단합을 하여 미래로 나아가자는 제작 의도와 취지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방심위는 이런 전체적인 핵심 메시지와 맥락은 무시하고 부분적인 것만을 문제삼았다. 프로그램의 내용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아이디어와 구상은 제작진의 판단과 결정의 몫이며 책임이다. 프로그램의 제작 의도를 담아서 전달하기에 적합한가라는 판단에서 출발한다. 오롯이 제작진의 창의성, 상상력, 구상력의 영역이다. 다큐멘터리를 구성하는 데 어떠한 내용을 좀더 중요하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의견은 다양할 수 있다. 북한의 남침을 중심으로 기술할 수도 있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단하고 처참한 민초들의 삶을 더 조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제작진의 마음대로 구성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상식적인 수준을 크게 넘지 않는다면 최대한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방심위의 제재는 제작진의 재량과 자율성을 심각하게 침해한 결정이다. 아울러 보수적 심의위원들의 관점과 다르다는 이유로 제재했다는 점에서 편향적이다.
방심위의 편향적 심의가 논란이 된 것이 이번만은 아니다. 방심위 심의의 편향은 ‘뿌리가 깊다’. 출범한 이후 줄곧 불공정 심의와 이중 잣대가 논란이 되어왔다. 정부에 비판적인 프로그램에는 가차없는 제재를 내리는 반면, 종합편성채널 등의 편향적이고 왜곡된 정치프로그램에는 솜방망이 제재로 흉내만 내거나 눈감아주기 일쑤였다. 친일인명사전에까지 등재된 백선엽씨를 전쟁 영웅으로 미화한 한국방송 다큐멘터리 <전쟁과 군인>에 대해서는 문제없음으로 결정한 적도 있다. 정치심의, 표적심의라는 비판을 넘어 보수세력이나 정권의 청부심의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였다. 객관성과 공정성을 지키지 않았다며 제재를 하였지만 이는 오히려 방심위를 향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불공정으로 얼룩진 정치심의의 부당함은 법원의 판결에서도 여러 차례 확인된다. 천안함 사건을 다룬 한국방송 <추적 60분>, 정부 정책을 비판한 시비에스(CBS) <김미화의 여러분>, 정의구현사제단 박창신 신부를 인터뷰한 시비에스 <김현정의 뉴스쇼> 등 객관성과 공정성 위반으로 제재를 했던 프로그램에 대한 행정소송에서 방심위는 잇달아 패배하였다.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 어느 작가가 볼테르에 관한 책에서 지어낸 말이라고 한다. 바로 한국방송 경영진이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방송의 자유와 독립은 제작과 편성의 자율이 토대를 이룬다. 프로그램 내용의 일부나 구체적 표현에 대하여 경영진과 제작진이 견해가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동의하지 않는 내용의 프로그램일지라도 제작과 편성에 대한 부당한 침해와 간섭을 막아주는 것이 경영진의 기본적 책무다. 방심위의 부당한 제재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고 그래도 안 되면 행정법원에 제재조치 처분 취소 소송을 내는 절차를 밟는 것이 한국방송 경영진이 지금 해야 할 일이다.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추적60분>에 대한 방심위의 경고 처분에 불복해 취소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한 적도 있지 않은가.
정연우 세명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정연우 세명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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