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으로 사람의 등급이 나뉜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유해온 꿈은 일확천금하여 벼락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함께 꾸는 꿈이었기에 경쟁률은 엄청나게 높았고, 그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대개 비윤리적이거나 반인간적이었다. 부호의 집을 털거나 왕공의 무덤을 파거나 전쟁에 참가하여 노략질을 하는 등의 방법이 있었는데, 기대 수익이 높은 만큼 당연히 위험도 컸다. 목숨을 걸지 않고 이 꿈을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푼돈을 모아서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화폐가 통용되던 시대에는 언제나 복권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화폐가 본격 유통된 18세기부터 산통계나 만인계라는 이름을 가진 벼락부자 생산 기계들이 출현했다. 돈을 낸 사람들의 이름 또는 번호를 적은 산가지나 종잇조각을 통에 넣어 섞은 뒤 그중 몇개를 뽑아 당첨자를 결정했는데, 간혹 추첨 과정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해서 ‘산통 깨지다’라는 말이 이에서 유래했다. 19세기 말에는 이런 계가 전국적으로 성행하여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들 사행성 계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전면 금지되었으나, 곧 부활하여 1899년에 결성된 만희사와 채회국은 아예 정부에 세금을 내고 경무사를 불러 추첨을 맡기기까지 했다. 일제 강점기에도 민간에서는 은행 알을 이용한 작박계가 성행했다. 공공기관이 공익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벼락부자 응모권을 처음 발행한 때는 1944년 12월이었다. 조선식산은행이 발행한 이 복표 한 장의 가격은 2원, 1등 당첨금은 1만원어치 황금과 청주 한말, 면포 한필이었다. 해방 이태 뒤인 1947년에는 런던올림픽 선수단 파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복권이 발행되었는데, 이후 각양의 공익적 명분을 내세운 각색의 복권들이 계속 발행되었다.
지금 복권은 매주 몇명씩 벼락부자가 되는 꿈을 이룬 사람들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자가 아니어도 행복할 수 있는 삶에 대한 꿈이 설 자리를 좁히는 구실도 하고 있다.
전우용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