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교가 국회와 언론, 지식인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 외교부 수장이 “미·중 양국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상황은 축복”이라는 부적절한 발언을 한데다, 청와대는 거센 교체 요구에도 외교라인을 재신임하겠다고 한다. 한-일 관계는 안보와 경제, 과거사 해결이라는 투트랙으로 풀겠다고 한다. 복잡해진 동북아 국제정세를 그 정도 해법으로 풀 수 있을까.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동북아 평화 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진전되지 못했다.
5·24 대북제재에 집착한 한국은 남북관계를 풀지 못했다. 상호비난이 난무한 채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실종되었다. 한-중 정상회담은 다섯 차례나 했는데, 한-일 정상회담은 한 번도 못했다. 동북아 평화 구상은 남북, 한-일 관계 냉각으로 제자리걸음이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중국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구상, 일대일로 건설에 자리를 내주었다. 한-러 간 철도사업 논의가 필요한데도 러시아 전승 기념식에 참가하지 않기로 했다.
혹자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운영 평가에서 인사와 소통은 미숙했지만, 외교통일 분야가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반박한다. 대북, 대일 원칙외교를 주장하면서 단호하게 대응한 점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일본발 외교위기론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면서 색깔이 바랬다. 미-일은 과거사보다 실리를 택했다. 중-일은 한국 머리 위로 악수를 나누었다. 중-러 역시 밀월관계다.
미-일 양국은 새로 동북아전략을 작성했다. 중국을 견제하고 미-일 동맹 강화에 합의한 것이다. 미-일 정상회담은 ‘21세기형 글로벌 미-일 동맹으로의 진화’를 뜻한다. 오바마-아베 공동 독트린에 가깝다. 미국은 한국이 중국에 크게 치우쳤다고 우려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6월 방미 중에 가장 큰 숙제는 미국내 한국 불신을 해소하는 것이다.
한국 외교가 사면초가에 빠진 이유는 뭘까. 한마디로 외교 구도를 너무 크게 그린 것이 잘못이다. 한국의 현실적 국력을 무시하고 자만한 셈이다. 현 정부 초기 한국 외교는 미·중 G2 체제에 중점을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잦았던 한-미, 한-중 정상회담은 잘나가는 양국관계를 상징하고 있었다. 북한과 일본에 단호한 원칙을 내세워도, 미국·중국과 밀월관계를 맺어 두면 된다는 자만심이 깔려 있었다. 남북관계는 천안함사태 사죄가, 한-일 관계는 위안부 해결이 우선시되어 개선되지 못했다. 한국이 기대하는 진정성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은 미국이나 중국이 아니다. 미국이나 중국도 G2 용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미국은 중국과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국력을 자랑하기 때문에, 중국은 G2가 부담해야 할 국제규범과 책임을 꺼리기 때문이다. 한-미 동맹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대중국 견제가 우선순위가 높다. 중국 견제와 글로벌 협력이 가능한 미-일 동맹을 더 환영한다. 중국도 한국이 예뻐서 밀월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다. 한-미-일이 연계해서 중국을 군사압박하는 부담을 줄이고자 러브콜을 보낸 것이다.
한국의 외교카드는 무엇인가. 한-미-일 연계를 통해서 북한·중국을 압박할 수 있다. 남북 협력 카드로 주변국을 설득할 수 있다. 한-일 협력 카드로 미국과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말하자면 남북, 한-일 관계는 가장 중요한 한국의 외교 지렛대다. 기본적인 전략을 무시한 채 원칙과 체면이 부풀려지면서 위기를 자초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미-일 동맹 강화로 중-일 관계는 대립 구도를 피하기 어렵다. 작년 5월 스톡홀름에서 북-일 합의를 했지만 아베 정권의 총련 탄압으로 다시 중단된 상태다. 남북, 한-일 관계 개선을 통해서 외교 주도권을 회복해야 한다. 투트랙 정도로는 안 된다. 남북, 한-일 정상회담으로 가야 한다. 올해가 바로 광복 70주년, 한-일 수교 50주년이 아닌가.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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