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2월20일치 <런던 그래픽 뉴스>는 서울 주재 프랑스 영사가 이탈리아제 란차 자동차를 타고 거리를 지나는 모습을 담은 삽화를 실었다. 그림 밑에는 ‘한국인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들고 가던 짐도 내버리고 숨기에 바빴다. 소와 말도 놀라서 길가 상점이나 가정집으로 뛰어들었다’는 주석을 덧붙였다.
1903년 고종이 미국에서 포드A 자동차를 들여왔으나 이 차는 경운궁 한구석에 고이 모셔져 있다가 러일전쟁 중 사라졌다. 그래서 서울 시민들이 질주하는 자동차를 실제로 본 것은 프랑스 영사의 차가 처음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직후 조선총독과 이태왕(고종), 이왕(순종)에게 각각 승용차가 배정되었고 1915년부터는 천도교주 손병희도 캐딜락을 타고 다녔다. 이해 7월22일, 경무총감부령 제6호로 ‘자동차 취체규칙’이 제정되었는데, 제17조 8항은 ‘우마가 놀라 뛰거나 또는 그럴 우려가 있을 때에는 바로 정차하거나 길가로 대피할 것’이었다.
자동차는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길과 보행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이 물건이 출현한 애초에는 사람과 동물, 자동차가 모두 같은 길을 이용했다. 그러다 사람은 곧 길가로 밀려났고, 길 복판은 자동차와 우마(牛馬) 차지가 되었다. 다시 얼마 후 자동차는 우마마저 몰아내고 길을 완전히 점령했다. 자동차가 지배하는 현대의 길은 옛날의 수로와 같다. 인도는 제방 도로이고 횡단보도와 지하보도, 보도육교는 교량이다. 길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것은 강물에 투신하는 행위와 같다. 게다가 배는 육지를 침범하지 못하나 자동차는 간혹 인도를 침범하기도 한다. 자동차가 도로를 점령한 뒤로 “차 조심해라”는 대표적 아침인사의 하나가 되었다. 보행도 차 타는 곳까지가 일차 목적지가 되고 차에서 내린 곳이 최종 출발지가 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자동차 없는 현대문명은 생각할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현대문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도 자동차 이용을 줄이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전우용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