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금강산 중노릇’이라는 게 있다. 관동의 아름다운 풍경은 천하에 으뜸인데다 민심이 순박하여 이곳에 수령으로 오는 자는 정무를 제쳐놓고 유람 다니는 게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금강산에 오를 때에도 가마를 탔다. 그 가마를 금강산 중들이 들었으니, 저 말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역을 겪을 때 쓰는 말이었다. 봉수군역도 조선시대 대표적인 고역이었다. 농사지으면서 매일 산꼭대기에 올라 봉수대를 살펴야 했으니, 그들이 눈치껏 요령 피운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산이 많은 땅에 삶터를 정한 탓에, 우리 선조들은 땔감을 구할 때에도, 나물을 캘 때에도, 가축을 먹일 때에도, 죽은 이를 묻을 때에도, 성을 쌓을 때에도, 산에 올라야 했다. 하지만 옛사람들은 야트막한 산만 이용했고, 금강산처럼 크고 깊은 산에 오르더라도 굳이 정상을 밟으려 들지는 않았다. 그런 산들은 신령과 맹수, 도둑들의 영역이었다.
북한산 인수봉 정상에 처음 사람의 발이 닿은 것은 1929년, 등정자는 당시 서울 주재 영국 부영사였던 클리프 아처로 공인되어 있다. 그는 가까이에 이런 산을 두고도 정복하려 들지 않은 조선인들이 이상하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얻을 것도 없는데 산신령의 진노나 맹수의 습격 위험을 무릅쓰고 험산에 오르는 사람이 더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산이 있기에 오른다’는 현대적 등산 개념을 이해하고 실행한 한국인은 1920년대 중반에야 출현했으며, 바닥에 미끄럼 방지 처리를 한 안전 등산화는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지나서야 발명되었다. 해방 전 이 땅에서는 등산화라는 말조차 사용되지 않았다.
등산화와 등산복이 대중화한 지 이제 겨우 한 세대, 요즘 휴일이면 전국의 큰 산 정상마다 사람들로 북적인다. 현대인은 산 정상을 밟는 걸 ‘정복’으로 착각하면서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잘난 체해도 그저 자연에 얹혀사는 존재일 뿐이다. 파리가 코끼리 머리에 앉았다고 코끼리를 다스리는 건 아니다.
전우용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