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한테 스케이트를, 박태환한테 수영을 가르치는 교육을 해야 한다.” 황우여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지난 7일 모교 방문 때 강조한 말이다. 황 부총리는 손주뻘 중학생 후배들한테 ‘꿈과 끼’를 살리는 자유학기제를 홍보하면서 거듭 두 스포츠 스타를 예로 들었다. 선의가 느껴지고 틀린 말도 아닌데, 이를 전해들은 학부모한테서 ‘날 선 반응’이 돌아왔다.
“스케이트 한 짝도 안 사줄 거면서, 무슨 ‘김연아한테 스케이트를’이에요.” 이 엄마는 최근까지 딸한테 피겨스케이팅을 가르쳤다. 김연아 같은 재능은 둘째 치고라도, 주 2회 한달 강습비 35만원, 피겨스케이트화 20만원, 피겨복 상·하의 각각 5만~6만원이 큰 부담이었다. 꿈과 끼가 있는 듯해 욕심을 냈더니, 가계가 휘청거렸다. 선수용 스케이트화 등 ‘장비 가격’이 두배로 치솟았다. 초급부터 1~8급으로 나뉜 급수를 딸 때면 최소 주 3~4회 강습이 뒤따랐다. 대회용 의상과 안무비도 한번에 50만원씩 뭉텅 빠져나갔다. 보통 2~3급부터는 ‘전공’을 생각하고 피겨를 탄다. 이 엄마는 2급 문턱에서 스케이트를 아이의 꿈 대신 취미로 낮췄다. “아이 재능만으론 안 되고 부모의 돈과 열정·끈기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게 엄마의 결론이었다.
“잘 들어요, 지금부터 산수니까~” 드라마 <프로듀사>에서 연예기획사 대표로 나오는 나영희씨는, 소속사 연예인이 주제넘는 일정을 잡아달라거나 철없는 피디가 견적 안 나오는 섭외를 요청할 때마다 이 말을 꺼낸다. 이 엄마가 정부의 자유학기제 정책을 향해 쏟아놓는 쓴소리를 정리하니 딱 그 말이었다.
이 엄마는 수영도 도긴개긴이라고 했다. 사설 어린이 수영장에서 취미로만 가르쳐도 한달 강습비가 12만원 수준이다. 이 엄마가 사는 동네엔 물이 깨끗하고 따뜻한 수영장이 있다. 특히 주 2회 한달 강습비가 3만5000원으로 파격적이어서 경쟁이 치열하다. 동네 학부모들은 선착순 회원모집에 아이를 등록시키려고 전날 밤부터 수영장 앞에 텐트를 친다.
한국에서는 뭐가 됐든 아이의 꿈과 끼를 찾는 데 ‘부모의 자원과 노력’이 과도하게 투입된다. 공교육이 지원하는 교육 시설과 프로그램이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더구나 꿈과 끼마저도 서열화하는 사회에서 김연아·박태환처럼 ‘경쟁력 있는’ 재능이 발견될 가능성도 크지 않다. ‘80 대 20’을 넘어 ‘1 대 99’가 우려되는 사회에서 어쭙잖게 꿈과 끼를 좇다간 밥 굶기 십상이다. 아이들 태반이 공무원 같은 안정적인 직업을 ‘꿈’이라고 적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요즘 교육열 과열 지역에선 정부 의도와 딴판으로 ‘자유학기제=학원학기제’로 통용된다. 제대로 된 특기 적성 프로그램도 없이 서둘러 정책을 도입하다 생긴 부작용이다. 상당수 학부모들이 자유학기제를 ‘중학생 자녀가 한 학기 동안 시험도 안 보고 놀면서 연애하는 것’쯤으로 여긴다. 특목고와 대학 입시를 준비할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까 봐, 학원 스케줄을 더 빽빽하게 잡아 아이를 가둔다.
자유학기제가 정착되면 아이들은 시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생각과 몸을 풀어놓을 수 있다. 부모들도 필요성에 공감하지만 꿈과 끼도 상대평가를 하는 사회에서 자녀를 책상 밖에 풀어둘 엄두가 나지 않을 뿐이다. ‘김연아’가 못 되면 호구지책도 어려운데, 스케이트 한 켤레 안 사주는 정부를 믿고 아이의 꿈과 끼에 베팅할 부모가 몇이나 되겠는가. 황 사회부총리는 교육·사회·문화 정책까지 총괄 조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황 부총리가 아이들의 ‘꿈과 끼’를 위해 할 일은 자유학기제를 원활하게 만들 사회 변화다. 그게 자유학기제를 마뜩잖아하는 대한민국 엄마들의 평균적인 ‘산수’다.
전정윤 사회정책부 기자 ggum@hani.co.kr
전정윤 사회정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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