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라는 단어의 뜻을 문자 그대로 풀면 ‘참모습을 본뜬 것’이다. 형체가 있는 모든 것을, 심지어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참모습에 가장 가까운 형상으로 평면 위에 재현한 것이 사진이다. 우리말로는 사진을 ‘찍는다’나 ‘박는다’고 한다. 사진을 처음 접한 우리 선조들은 이를 도장이나 활자처럼 사람과 사물을 실체 그대로 찍어내거나 정해진 크기의 틀에 맞춰 박아 넣은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사진을 ‘찍히면’ 혼의 일부가 달아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등 불빛을 이용해 사진을 벽면이나 장막에 투사하는 기계는 ‘환등기’라 불렸다. 아무것도 없던 벽면에 갑자기 영상이 떠오르는 것이 마치 환상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실상을 표현한 사진들로 환상을 만들어내는 기계에 이보다 더 적합한 이름을 붙이기도 어려울 듯하다. 환등기가 등장한 지 얼마 뒤, 수많은 사진들을 연속으로 비추어 움직이는 영상을 만들어내는 기계도 발명되었는데, 이 기계에는 가치중립적인 영사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1899년 12월8일,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가 자기 집에 대한제국 정부 고관들을 초청하여 환등회를 열었다. 그로부터 불과 2년 뒤인 1901년 9월14일, <황성신문>은 활동사진을 처음 본 사람의 감상문을 실었다. “사진은 그림에 불과하거늘 전기를 사용해 비추니 살아있는 사람이 움직이는 것과 같았다…. 이런 신기한 물건은 천고에 듣도 보도 못한 것이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제나 이런 묘술을 배울 수 있을꼬.” 이에 대해 황성신문은 “우리가 바라는 것은 사진 속의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기술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고 논평했다.
그러나 황성신문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현대는 단편적인 ‘참모습’들을 조합하여 허구와 환상의 서사를 만들어내는 기술만 발전시켰다. 사람들의 혼은 사진을 찍힐 때가 아니라 움직이는 사진을 볼 때 달아나곤 했다. 영사기는 진실과 허구, 실상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한 세상을 만들어냈고, 현대인은 그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
전우용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