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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모내기와 써레씻이 / 김계수

등록 2015-06-15 18:41

우리집에서도 지난주에 모내기를 마쳤다. 땅에 꽂힌 뿌리가 자리를 잡아 모가 반듯하게 섰고, 잎은 점차 짙은 색을 더해가고 있다. 들녘에서 보리나 밀 또는 사료용 풀 등 겨울작물을 재배하는 논이나, 봄에 배추와 감자 등을 심어 수확한 논에서는 아직 모내기가 한창일 것이다. 경험 많은 노인들의 말로는 하지 전까지만 모를 심으면 가을에 쌀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전에는 동네의 모내기가 모두 끝나면 ‘써레씻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한동네의 농사꾼들이 이른 봄 못자리부터 시작해서 쟁기로 논을 갈아 물을 대고, 산에서 풀 뜯어다 거름으로 넣고, 써레질해서 모를 심기까지 벼농사의 전 과정에서 가장 길고 힘든 고비를 넘긴 것을 자축하고 노고를 서로 위로하는 잔치였다. 써레를 이듬해 농사 때까지는 쓸 일이 없기 때문에 씻어서 보관한다는 뜻인데, 이 말을 잔치의 이름으로 쓴 것이 재밌다. 모를 심기까지 해내야 했던 일이 얼마나 고단한 것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런 잔치를 찾아볼 수 없다. 농사짓는 사람이 워낙 적기도 하려니와 벼농사의 비중이 과거에 비해 많이 낮아진 탓도 있다. 그러나 농기계의 성능과 화학비료의 효율이 좋아지면서 모내기까지의 일이 훨씬 수월해진 것도 큰 이유일 것이다. 여러 작물 중에서 벼의 재배면적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기계화가 가장 많이 이뤄진 분야도 단연 벼농사다. 실제로 2, 3만평 정도 되는 논의 모내기는 거의 주인 혼자서 해낸다. 몇천평 농사는 맘만 먹으면 4~5일 만에 뚝딱 해치울 수 있다. 모내기에 쓰이는 이앙기의 성능도 갈수록 좋아져서 논의 빈자리나 땅에 꽂히지 않은 모를 다시 심는 ‘뜬모’ 작업을 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졌다. 나이 많고 알뜰한 할머니가 있는 집에서나 어쩌다 할 뿐이다.

과거에 큰 논에서 손으로 모내기를 하는 모습은 볼만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붉은 실을 엮은 긴 못줄 앞에서 다리와 팔목을 걷어붙인 사람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허리를 굽혔다. 못줄을 잡은 두 사람은 ‘자’ 하는 소리를 질러 동시에 못줄을 옮기고, 심는 사람들은 능력에 따라 간격을 조정하고 옆 사람을 배려해서 못줄이 지체되지 않도록 했다. 이때 발가락 사이를 비집고 올라오면서 미묘한 쾌감을 주던 논흙의 부드러운 느낌과, 논둑에 어울려 앉아 나눠먹던 못밥의 맛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현대인, 특히 도시민의 생활상의 큰 특징을 표현하는 말 가운데 하나로 단절 혹은 분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산업의 고도화와 도시화의 경향에 따라 자연은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점차 멀어져 주말에 가끔 접하는 소비재가 되어간다. 이웃과의 관계는 귀찮고 피곤한 것이 되었고, 윗세대의 경험은 시대착오적인 것이어서 쓸모가 없다. 가족 사이에서도 낮 동안에 삶의 공간이 분리되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폭이 갈수록 줄어들면서 경제적 기능만이 가족을 힘겹게 지탱하고 있다.

김계수 농부·순천광장신문 발행인
김계수 농부·순천광장신문 발행인
이러한 변화는 농촌 사회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는 개별적으로 했던 못자리 만드는 일이 기계화되면서 마을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하는 일로 변했을 뿐 이후에 모내기를 비롯해 논을 관리하고 벼를 수확하기까지 모든 과정은 기계가 혼자서 해낸다. 그 덕분에 농사꾼의 손은 흙을 거의 만지지 않고, 발바닥이 땅을 밟지 않고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농사는 공동체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고 농사꾼 또한 자연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백설탕이 원재료가 갖고 있는 미네랄 등 이로운 성분들을 제거한 뒤 순수하다고 말하듯이, 농사 또한 여러 거추장스러운 요소들을 점차 제거하고 오로지 수입을 목적으로 하는 순수한 경제활동이 되어간다.

김계수 농부·순천광장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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