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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금계랍

등록 2015-06-22 18:48


며칠 전 새누리당 보수혁신위원장 김문수씨는 경남의 한 대학교 특강에서 “원자폭탄은 겁내지 않으면서 낙타독감 따위에 난리인 대한민국 사람 웃긴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간이 전쟁보다 질병을 더 두려워한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사람이란 본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상황보다 그렇지 못한 상황을 더 겁내는 법인데다가, 실제로 질병의 살상력이 전쟁의 살상력보다 더 컸다. 심지어 전시에도 전투로 인한 사망자보다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더 많았으니, 전투 중 사망자가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보다 많았던 최초의 전쟁은 1905년의 러일전쟁이었다.

1492년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 이후 새로운 약탈지를 획득하기 위해 열을 올렸던 유럽인들도 낯선 땅에서 조우한 적대적인 사람들보다 전에 겪지 못했던 질병을 더 두려워했다. 사람을 굴복시키는 일은 우수한 무기를 이용해 쉽게 처리할 수 있었으나, 질병을 정복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열대지역에 흔한 감염병이던 말라리아 치료제로 퀴닌이 개발된 것은 1820년이었는데, 이 약은 개항 이후 서양의학과 함께 금계랍(金鷄蠟)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금계랍의 탁월한 효능 덕에 말라리아 공포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우두법이 나와 아이들이 잘 자라고 금계랍이 나와 노인들이 오래 산다’는 유행가까지 만들어 불렀다. 그런데 그 시절 사람들은 증상과 질병이 다르다는 사실을 잘 몰랐기 때문에, 이 약을 열이 나는 모든 질병에 통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여겼다. 열이 난다 싶으면 바로 금계랍을 입에 넣었고, 아이 젖을 떼기 위해 엄마 젖꼭지에 바르기도 했다. 그 탓에 근 한세기 동안 한국 아기들이 처음 접하는 쓴맛은 금계랍 맛이었다.

이런 현상을 부추긴 것은 떠돌이 약장수들이었다. 그들은 약의 효능을 함부로 과장해 선전했으니, 오늘날에도 약장수는 사기꾼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고추장 김치 많이 먹은 우리 민족, 메르스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금계랍에 이어 새로운 만병통치약이 나왔나 보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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