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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감시카메라

등록 2015-07-20 18:31

눈은 특권적인 감각기관이다. 시각에 포착된 정보는 다른 감각으로 얻은 정보들에 우선한다. 그래서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고, ‘Seeing is Believing’이다. 우리 일상 언어생활에서도 상대의 최종 판단을 이끌어내고자 할 때에는 항용 ‘봐’를 덧붙인다. 냄새 맡아봐, 먹어봐, 소리 들어봐, 만져봐, 느껴봐, 심지어 봐봐까지.

보는 행위에도 관찰, 산견, 조망, 주시 등 여러 종류가 있다. ‘감시’는 지시와 복종, 통제와 수용 등의 권력 관계에서 작동하는 시선이다. 부모가 자식을, 간수가 죄수를, 무장군인이 포로를 감시한다. 감시하는 자가 주인이고 감시당하는 자가 종이다. 감시의 그물망은 곧 권력이 미치는 범위이며, 그 그물코가 촘촘한 만큼 권력은 세밀하게 작동한다. 조선시대 최고위 지방관의 직함을 관찰사, 다른 말로 감사라 한 것은 꽤나 솔직한 태도였다.

감시 기술의 발전 과정은 곧 권력의 확장, 강화 과정이었다. 1791년, 제러미 벤담은 어두운 곳의 간수 한명이 밝은 곳의 죄수 수백명을 감시할 수 있도록 원형감옥 패놉티콘을 고안했다. 하지만 사람의 눈에는 한계가 있다. 지치지도, 한눈팔지도 않는 감시자는 텔레비전과 함께 탄생했다. 1949년 조지 오웰은 텔레비전에서 영감을 얻어 소설 <1984>를 발표했다. 여기에서 그는 독재자가 기계 눈으로 국민 모두를 감시하는 암울한 미래를 예견했다. 그런데 그런 미래는 그의 예상보다 빨리 도래했다.

1969년, 서울 거리에 교통법규 위반을 감시하는 카메라가 설치되었다. 감시카메라는 이후 은행, 특급호텔 등으로 조금씩 확산되다가 디지털 녹화 기술이 개발된 뒤 생활공간 곳곳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현대인은 감시카메라에 포위된 채로 살지만, 조지 오웰이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덜 위축되어 있다. 아직까지는 그것을 ‘공공의 눈’이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계의 무차별적 시선 뒤에 사람의 차별적 시선이 있는 이상, 이 공공성은 얼마든지 훼손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감시할 권리가 곧 ‘주권’이라는 점도. '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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