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특별기고] 나, 아메리카 합중국 혁명 사령관 / 윤구병

등록 2015-07-23 18:57

“경부선 열차를 타고 서울을 떠나 부산을 향해 절반쯤 가다 보면 충북 영동에 한 굴다리를 지나게 된다. 노근리 마을로 가는 쌍굴다리이다.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은 바로 이곳에서 일어났다. 1950년 7월26일부터 29일까지 미군은 하가리와 노근리 일대에서 피난 가던 사람들을 폭격, 기총소사로 대량 학살했다. …… 산산이 바스러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거나 이름을 알 수 없는 시신들. 학살 이후 부상과 후유증으로 죽은 피난민들까지 다하면 피해자는 400명이 넘는다. 지금까지 미국 에이피(AP) 통신 기자나 미 국방성 조사반에게 미군이 노근리에서 민간인을 공격한 사실을 증언한 참전 미군은 확인된 사람만 25명이다.” 정은용이 쓰고 박건웅이 그린 600쪽이 넘는 그래픽노블 <그 여름날의 기억>(노근리 이야기 1부) 맨 마지막에 나오는 글이다.

‘한국전쟁’에서 이런 짓을 저지른 아메리카 합중국은 베트남 전쟁 때는 밀라이에서 더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 1968년 3월16일 윌리엄 캘리 중위가 이끄는 26명의 군대는 노인, 부녀자, 아이들(젖먹이까지)을 무차별 살해하는 것만으로 모자라 여자들을 강간하고 가슴을 도려내는 짓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 스물여섯의 강간살인범들은 재판에 회부되지만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캘리 중위뿐이고, 처음에는 여론에 밀려 종신형을 받았던 이 친구마저 가택연금 3년 6개월 만에 풀려난다.

스무 살 안팎의 돈 없고 뒷심 없는 젊은이들을 나라 안팎의 싸움터로 내보내 사람백정을 만드는 합중국의 전통은 오래되었다. 이 나라에서 돈벌이와 권력 사다리 타기는 ‘전쟁광 되기’와 맞먹는 말이다. 한반도 허리에 38선을 그어 동족상잔의 빌미를 제공한 트루먼에서부터 이 나라 남녘땅을 대중국 전쟁 전초기지로 삼으려는 오바마까지 역대 합중국 대통령치고 전쟁광으로 바뀌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다. 나는 아메리카 합중국 혁명군 사령관이 되겠다고 진즉부터 마음먹었다. 다들 미국이 짱이라고 여길 때도 나는 다른 모습을 보았다. 전쟁광인 조지 부시가 아프가니스탄이 오사마 빈 라덴을 그 나라에 숨겨 주었다는 까닭만으로, 군사력이라고는 탈레반 5만명에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외교적으로도 고립되어 겨우 파키스탄하고만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그 힘없는 나라에 66개국의 연합군을 앞세워 쳐들어갈 때, 그리고 그 막강한 군사력과 화력으로도 그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아메리카 합중국이 ‘종이호랑이’임을 알아챘고, 대한민국 육군 소위 정훈장교 출신인 60 넘은 나라도 이 만만한 나라를 뒤집어엎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부풀어 올랐다.

나는 틈만 나면 아메리카 합중국 혁명 전쟁 전술 교범을 머릿속에 쓰는 데 골몰했다. 혁명 참모부의 구상은 이미 오래전에 섰다.(참고로 말하자면 하워드 진과 노엄 촘스키도 참모진의 일원이었는데 내 부임 날짜가 늦어지는 바람에 하워드는 이미 죽었고 노엄도 죽을 날이 오늘내일이다.) 전쟁 비용은 할리우드 베벌리힐스 근방에 세탁소를 열고, 거기서 어정거리는 유명 배우들이 입다 버린 옷가지며 심지어 속옷들까지 깨끗이 빨아 경매에 부쳐서 마련하기로 했다.

다 알다시피 해마다 이 세계 이곳저곳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스무 번쯤 일어나야 ‘팍스 아메리카나’(합중국의 평화)는 유지될 수 있다. 다만 조건이 있다. 그 전쟁은 아메리카 영토 밖에서 일어나야 한다. 약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중국이나 러시아나 어느 나라도 자기들 사이에 전면전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른바 강대국 사이에서 전면전이 일어나면 핵무기와 화생방무기가 온 하늘 온 땅을 뒤덮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남아나지 않을 것을 이 나라 전쟁광들이 누구보다 더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힘없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국지전, 내전은 팔 걷어붙이고 뒷받침하지만 저들 사이에서는 서로 쑥떡 먹이고 삿대질만 할 뿐이다.

내전은 무기의 성격을 바꾼다. 아메리카 합중국 혁명군 사령관인 나는 총칼이나 대량살상무기를 손에 들 필요가 없다. 나를 상대하는 전쟁광들이 손에 드는 무기도 그만그만할 것이다. 제 나라 국민들 사이에 스며들 혁명군들을 잡아죽이겠다고 대량살상무기, 이를테면 탄저균이나 마더밤(공중폭발대형폭탄)이나 핵무기나 고고도 미사일을 쏠 수는 없다. 검은 물(블랙워터) 단원이나 아메리칸 스나이퍼나 이소룡이나 성룡 같은 무예계의 고수들이 혁명군과 전쟁광들 가운데 어느 한편에 서서 혁명 세력이 되거나 반동 세력에 빌붙을 터인데, 내란에서 최대의 무기는 멕시코 사파티스타 혁명군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일찍이 밝혔듯이 ‘말’이다. 되풀이하자면,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다.’

“입 닥쳐!” “주둥이 잘못 놀리면 죽을 줄 알아.” “말 많으면 공산당이야.” 옛날부터 전쟁으로 권력을 쥐거나 유지하고 있는 놈들은 말 많은 치들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했다. 오죽하면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했겠는가. 오죽하면 아테네 전쟁광들이 나이 일흔이 넘은 소크라테스를 독약 먹여 죽였겠는가. 오죽하면 비폭력 불복종 운동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간디가 80이 넘은 나이에 애국 광신도 손에 암살을 당하겠는가. 오죽하면 말 많은 검둥이라 하여 마틴 루서 킹을 쏘아 죽였겠는가.

아메리카 합중국은 말 많은 평화주의자들을 죽이거나 가두어 입 닥치게 하기로 악명이 자자한 나라다. 아메리카 합중국 군산복합체의 상징인 쌍둥이 빌딩이 순식간에 주저앉은 9·11 이후로 제멋대로 아가리 놀릴 권리가 부여된 유일한 집단은 기독교를 믿는 부시 일파 흰둥이들뿐이다. 나머지는 공항검색대에서 홀랑 벗겨놓고 사타구니 밑을 더듬어도 모두 입 다물어야 한다. 이러한 침묵의 문화는 아메리카 혁명군의 전략 전술 운용에 크게 도움이 된다. 대량 매체가 극우 세력의 나팔수가 되어 있는 것도 나쁜 조건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대한민국 대량 언론 매체인 조중동문, 엠비시, 케이비에스, 최근에 기승을 부리는 종편들을 비롯해서 전세계 극우 언론의 노가리에 귀를 닫을 만큼 대량 매체의 힘과 한계를 누구보다 더 잘 겪은 사람들이다. 우리 혁명군은 아메리카 합중국에서 가시 돋친 말로 대거리를 하는 대신에 사랑을 속삭일 것이다. 우리가 갈고닦은 말의 전통은 그리스-히브리 전통이 아니다. 그 매끄러운 수사학과,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헐뜯는 논쟁술, 그리고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습니다’를 줄줄이 읊으면서 한편으로는 저와 다른 뜻을 가진 사람들의 말을 이단으로 낙인찍고 마녀사냥을 하는(이를테면 매카시즘 선풍) 그 말싸움에서 벗어나 저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 아무 데도 기댈 데가 없어서 전쟁광들의 총알받이가 되어 먼 나라에 가서 죽거나 종살이를 하더라도 군소리 한마디 할 수 없는 이들의 귀와 입이 될 것이다.

윤구병 농부철학자
윤구병 농부철학자
내가 혁명 사령관으로 미국에 도착하면 맨 먼저 제주 4·3 항쟁에 깊은 관심과 슬픔을 함께 나눈 노엄 촘스키와 이번에 대한민국 정부의 냉대를 꾹꾹 눌러 참고 휴전선을 넘어온 평화운동가들, 특히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만나 고마움을 전하고, 다음으로 <볼링 포 콜럼바인>을 감독하고 제작한 마이클 무어를 찾아가 그의 카메라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무기로 바꿀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리고 미시시피 유역을 오르내리면서 마크 트웨인의 책들을 읽고 낄낄거리는 책읽기 모임을 꾸리고, 거기에 곁들여 찰스 디킨스, 조너선 스위프트의 책도 함께 읽으면서 우리의 무기인 말 씨앗을 그 바람이 왼쪽에서 불든 오른쪽에서 불든 가리지 않고 모든 바람에 날려서 언제 어디에서나 평화의 꽃으로 피어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독서목록에 <강아지 똥>이나 <한티재 하늘>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같은 권정생의 책들도 살그머니 끼워 넣을 것이다.

윤구병 농부철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