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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여권

등록 2015-08-17 18:39

190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대한제국, 조선총독부, 대한민국 관보 말미에는 대개 ‘행려사망자’ 통계가 실렸다. 현재 각 시·도 자치단체의 공고는 행려사망자를 무연고시체와 동의어로 사용하나, 본래는 ‘행려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란 뜻이다. 정처 없이 떠도는 일이 행려이며, 그러다 걸리는 병이 행려병이다. ‘여행’의 글자 순서만 뒤집은 행려라는 단어가 생긴 것은, 목적지와 귀환지가 있는 이동이 상대적으로 훨씬 안전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류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여행은 고통스럽고 위험한 일이었다. 교통, 숙박, 취식 등 어느 한 가지 편한 것이 없었으며, 강도와 맹수의 위협은 변수보다는 상수에 가까웠다. 자기 나라 안에서 돌아다니는 것도 위험했는데 하물며 풍습이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사람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랴. 기독교 단일 종교권으로서 성지 순례 여행이 드물지 않았던 유럽에서조차, 이방인은 불운이 닥쳤을 때 가장 먼저 의심받는 존재였다.

세계 정복에 나선 제국주의가 가장 먼저 무찔러야 했던 것은 바로 이 여행의 위험성이었다. 여행자의 안전 보장을 요구하는 문서의 연원은 구약성서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지만, 이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다. 개항 후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인들도 여권을 소지했으며, 조선 정부는 그들에게 오늘날의 비자에 해당하는 호조(護照)를 발급해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02년 하와이 이민을 주관하기 위해 궁내부 산하에 유민원이란 기관이 설치된 뒤 처음 여권이 발급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인도 필요에 따라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여권을 발급받았는데, 최다 발급을 기록한 1937년에도 72건에 불과했다. 여권이 특별한 사람들이나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문서의 지위에서 벗어나 대중화한 것은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이후였다. 그 뒤 불과 25년, 이제 여권은 개인들에게 일국의 국민인 동시에 세계 시민이라는 이중 정체성을 실감시키면서 국경의 의미를 흔드는 물건이 되었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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