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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소떼 몰던 정주영이 그립다 / 김의겸

등록 2015-09-02 18:49

43시간 만에 남북대화의 물꼬가 트인 게 8월25일이다. 그날 공교롭게도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가 발행됐다. 우표 속 정주영은 머리숱도 많고 혈기가 왕성하다. 하지만 검버섯 핀 얼굴에 부축을 받던 정주영의 인상이 더 강렬하게 남아 있다.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으며 훠이훠이 손을 흔들던 모습 말이다.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은 햇볕정책의 옥동자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 역도 성립한다. 정주영의 소떼가 금강산과 개성을 분만하지 않았다면 김대중의 햇볕정책도 빛을 잃었을 것이다. 소떼는 사실상 휴전선 철책을 북쪽 저 멀리 밀어버렸다. 장전항은 애초 북한 해군함대의 최전방 기지이자 잠수함 기항지였다. 개성 일대는 북한군 제2군단 6사단이 서울을 겨냥해 각종 대포를 조준하고 탱크를 배치한 곳이었다. 그러나 소떼가 들어가자 장전항은 관광 항구로 바뀌었고 함대는 북쪽으로 옮겨갔다. 개성의 무기들도 북서쪽 10여㎞ 후방인 송악산 이북 산악지역으로 이전했다. 그걸 무력으로 이루려고 했다면 얼마나 많은 비행기와 탱크가 필요했겠는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만 했겠는가.

남북정상회담의 길을 터준 것도 정주영이다. 어긋나기만 하던 두 정상의 만남은 총련계 일본인 요시다 다케시가 나서자 급류를 타기 시작한다. 싱가포르에서 박지원-송호경의 비밀접촉을 만들어낸 것이다. 요시다는 1980년대부터 정주영의 대북 대리인이었다.(임동원 <피스 메이커>)

북한으로 진출하기 위해 정주영은 멀리 내다보고 차곡차곡 준비했다. 최근 출간된 <영원한 도전자 정주영>을 보면 정주영의 꿈은 1981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올림픽 유치 위원장으로 바덴바덴에서 북한 김유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마주치자 “내 돈을 들여 판문점 한가운데에 1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을 건설할 테니, 남북 선수들이 함께 이용하자”고 통크게 제안한 것이다. 1989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으나 다시 더 9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사이 정주영은 서산 농장에 소 150마리를 사주면서 잘 키우라고 한다. 서산에 들를 때마다 외양간을 찾았다. 새끼를 쳐서 몇 마리나 불어났는지, 아픈 소는 없는지 물었다. 정주영이 왜 소한테 각별한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는 혼자서 소떼 드라마의 각본을 하나하나 그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 군부는 소떼가 판문점을 지나는 걸 결사코 반대했다. 한때 배로 보내는 방법이 검토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주영의 고집이 더 셌다. 정주영은 소 발굽 아래 냉전의 장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전세계에 꼭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모든 기업인들에게 정주영처럼 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대북 사업은 예측불허의 위험성이 항상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대는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상황이란 언제든 변하는 법이다. 위험이 없으면 수익도 없다. 특히 지금 한국 경제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하고 저성장의 늪에 빠져 있다. 대기업들은 투자할 곳이 없다면서 사내유보금을 1000조씩 쌓아놓고 있다. 거기서 100분의 1이라도 헐어서 쓴다면, 정주영의 표현대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주, 북한과 남한 그리고 일본 열도를 잇는 번영의 고리’를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우린 언제나 섬나라다.

김의겸 선임기자
김의겸 선임기자
정주영은 직원들이 소 1000마리를 준비하자 1마리 더 보태라고 한다. 1000이면 끝이 0이라 완성되는 숫자이고 1이면 새로 시작하는 의미를 담기 때문이다. 대북 사업은 이제 시작이고 계속돼야 한다는 의지가 실려 있는 숫자다. 바야흐로 정주영의 뜻을 이어갈 시기가 무르익고 있다. 마침 9일 프레스센터에서 ‘정주영과 남북관계’를 주제로 세미나가 열린다. 정주영을 느껴보고 미래를 내다보기에 좋은 자리가 될 것이다.

김의겸 선임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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