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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이산가족, 예수님, 장군님 / 권혁철

등록 2015-09-08 18:34

2002년 4월30일 오전, 금강산에는 부슬부슬 봄비가 내렸다. 금강산에서는 그해 4월28일부터 30일까지 제4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열렸다. 당시 나는 이를 취재하고 있었다.

30일 오전 2박3일간의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끝났다. 이날 오전 남쪽 이산가족들이 북쪽 가족들에게 손을 흔들며 버스를 타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50년 넘게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이 사흘간 만나고 다시 기약없이 헤어지고 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짧은 만남 뒤 긴 이별이 안타까웠고, 이산가족 상봉이 체제 선전의 무대로 전락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백발의 노인들이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며 손을 꼭 잡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모습. 사람들이 이산가족 상봉 하면 대개 떠올리는 장면이다. 다음달 20~26일 금강산에서 있을 이산가족 상봉 때도 기자들은 ‘남북 이산가족들이 정담을 나누며 반세기 단절의 강을 건넜다’고 보도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2002년 4·10월 두차례 이산가족 상봉을 취재하면서 본 ‘현장’은 이와 달랐다. 먼저 만나자마자 부둥켜안고 우는 이산가족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어색한 표정으로 안부를 묻는 한두 마디 말을 건넨 뒤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해 1~2차례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면서 부모, 부부, 형제들이 먼저 만났다. 이후에는 직계가족이 아니라 사촌, 시동생 등을 만나는 사람들도 나왔다. “만나서 반갑지만 안 만나도 그만이지.” 내가 2002년 4월 이산가족 상봉 때 북쪽의 사촌을 만난 한 어르신에게 소감을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산가족 상봉이 남북 분단을 뛰어넘는 숭고한 인도주의 현장이라고 생각한다. 꼭 그렇지는 않다. 이산가족 상봉 현장에선 남북 분단이란 현실이 날카롭게 부딪힌다. 나는 50여년 만에 만난 북쪽의 가족들에게 “예수 믿고 같이 천당 가자”고 열심히 선교하는 남쪽 가족을 봤다. 북쪽 가족들도 만만찮았다. 북쪽 가족들은 한눈에 봐도 힘들게 살아온 티가 역력했다. 남쪽 가족이 안쓰러운 마음에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느냐”고 물으면 이들은 “(김정일) 장군님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며 버럭 화를 냈다.

북쪽 가족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변인’처럼 행동하는 것은 북쪽 기관원과 기자들 때문이다. 우리로 치면 국가정보원 직원쯤 되는 북쪽 기관원들이 가슴에 ‘보장성원’ 표찰을 달고 이산가족 상봉장 곳곳을 돌아다닌다. 이들이 나타나면 북쪽 가족들이 갑자기 우렁찬 목소리로 “세상에 부럼 없어라”고 외친다. 또 팔목에 ‘기자’ 완장을 두른 기자가 나타나면 북쪽 가족들은 “우리는 행복하다”고 외친다.

이산가족 만남 현장을 지켜보면, 양쪽이 현재 이야기를 하면 의견 다툼이 생기고, 얘기 자체가 막히곤 했다. 하지만 헤어지기 전 기억들이 화제로 오르면 금방 분위기가 달라져 남북 가족이 손을 잡고 ‘고향의 봄’을 합창하곤 했다.

나는 이산가족 상봉이 반짝 만남이지만 그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평소 통일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통일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렵게 성사된 다음달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이 상봉 정례화의 디딤돌이 됐으면 좋겠다. 2002년 4월 이산가족 상봉 때 금강산에서 만났던 소설가 김원일씨는 상봉 정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마치 부모가 군에 있는 아들 면회 가듯이 김밥과 통닭을 들고 가서 한두시간 이야기하고 돌아오면 된다 이겁니다. 다시 보고 싶으면 시간을 정해 또 만나면 되고요. 이런 자리에서 체제 선전 같은 게 나오겠어요?”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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