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적십자 실무접촉은 24시간의 마라톤협상 끝에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10월말 열기로 합의했다. 다행이다. 경험상 이 정도 합의문이라면 서너 시간이면 충분히 타결이 가능한데, 24시간 밤샘 협상이 이루어졌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2008년 7월의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이나 2010년 3월 북의 천안함 폭침 사건 등을 지혜롭게 해결했더라면 5년이라는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이 기회를 놓친다면 이산가족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포함해 남북 교류 재개 활성화의 호기를 날릴 수 있다는 절박한 마음이 든다. 남북간 접점의 현장 경험을 통해 얻은 감과 지식으로 지금 북한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전함으로써 정책 판단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북한이 상봉 시기를 10월 하순으로 주장한 이유는 표면적으론 준비기간을 얘기했다지만 실은 우리의 행동 여하에 따라 10·10 당 창건 70주년 기념행사 기간의 미사일 발사 실험이나 상봉 행사의 취소 등 우리에게 부담을 주는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복선을 깔고 있다고 본다. 북한은 8·25 합의 전체의 동시 이행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이산가족 상봉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순수하게 인도적인 일이지만, 북에는 정치적인 사안으로 자신들의 최우선 정책목표인 체제안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나름대로는 결단이 요구되는 사업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우리가 결단을 하고 있으니 당신들도 결단을 하라는 메시지이다. 당국회담을 통해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와 5·24 조치 해제 문제를 함께 논의하자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조만간 북은 당국회담을 제의해 올 것이다. 지난번과 같이 회담 대표의 격을 따지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원칙대로 가면 된다. 정부조직법상 통일 문제는 통일부 소관이다. 통일부는 산하에 남북회담본부도 두고 있고 20여차례의 장관급 회담 노하우도 갖고 있다. 더욱이 이번 고위급회담에서도 보았듯이 회담의 최종 결정은 결국 최고 통치자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면 우리가 먼저 당국회담을 제의하는 게 좋다고 본다. 적십자 본회담에 탄력을 불어넣어 박 대통령의 뜻인 생존 이산가족 신청자 모두의 명단을 북에 전달해 생사 확인을 하고 금강산면회소에서 상봉을 정례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과거 금강산 상봉 행사장에서 만난 북쪽 인사들은 이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언급한 적이 있다.) 상봉 신청자의 절반이 세상을 떠났다는 가슴 아픈 현실을 생각하면 이것저것 따질 계제가 아니다. 금강산 관광에 들어가는 현금이 핵미사일 개발에 전용된다는 일부의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현금 대신 현물(북이 원하는 생필품 등)로 지급하는 방안도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다고 본다. 고성군 주민들의 경제적 어려움 해소, 중국 관광객들의 금강산 투어를 통한 관광수입 증대, 우리 청소년들의 통일학습장이라는 점 등 금강산 관광은 북에만 이득을 주는 사업이 아니다.
정부의 통일대박,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디엠제트 생태평화공원 조성, 경원선 복원사업 등 야심찬 구상들은 북한과의 협력 없이는 모두가 불가능한 사업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5·24 조치 해제 문제도 전향적으로 볼 수 있다고 본다. 목함지뢰 도발사건을 8·25 합의로 해결한 지혜를 다시 한번 활용하면 어떨까. 남북간 화해협력 평화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 남북 주민들의 불안감 해소 등 더 큰 국익을 생각하자. 제발 이번만은 과거의 주장에 얽매여 하늘이 주는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음이 없기를 고대한다.
이성원 한라대 동북아경제연구원 부원장
이성원 한라대 동북아경제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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