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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황우여 부총리의 ‘소명’ / 전정윤

등록 2015-09-15 18:40

지금 우리나라에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정말 피하고 싶은 뜻밖의 한 사람이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무슨 해괴한 소리냐’ 싶겠지만 황우여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다. 사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다.

황 부총리가 국정화만큼은 어떻게든 미뤄보고 싶어한다는 얘기가 정치권과 교육계 안팎에 나돈 지는 꽤 오래됐다. 적극적으로 국정화에 반대한다는 건 아니다. 적어도 본인 임기 안에는 국정화 발표를 피하고 싶어한다는 게 여러 국회의원과 교육부 관료들의 전언이다.

여러 가지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는데, 우선 총선 출마를 계획하고 있는 ‘정치인’ 황 부총리에게 ‘득’ 될 게 없다. 황 부총리가 국정화 작업을 마무리하고 새누리당 인천 연수구 국회의원 후보로 나선다고 치자. 상대편 후보들이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시킨 시대착오적이고 비교육적인 정치인”이라는 공세를 퍼부을 게 뻔하다. 게다가 야당과 역사학계·역사교육계·교육감은 물론 조·중·동 등 보수 언론들마저 국정화를 비판했다. 황 부총리로선 이런 정치적 논란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국정화 교육부 장관 황우여’로 기록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국정 한국사 교과서를 도입한다고 해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걸 황 부총리도 모르지 않을 테다. 이른바 선진국들은 더 이상 국정 교과서를 쓰지 않는다. 세계적 흐름은 검정·인정제를 넘어 자유발행제로 가고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 잠시 국정으로 뒷걸음질할 수는 있어도 역사의 물줄기를 되돌릴 수는 없다. 판사 출신 4선 의원에 여당 대표까지 지낸 황 부총리가 재물이나 이권에 큰 욕심을 낸다는 얘기가 들리진 않는다. 다만 국회의장으로 공직을 마무리하고 싶어한다는 설은 파다하다. 명예가 중요한 분일 텐데, 당대는 물론 후대 역사에 길이 치욕으로 남을 ‘국정화 교육부 장관’ 꼬리표가 달갑지는 않을 것 같다.

황 부총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알려져 있다. 구약성경 창세기를 보면, 국정화의 주된 근거인 ‘하나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하나의 언어’ 이야기가 나온다. 창세기 11장 1절은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로 시작된다. 사람들이 ‘온 땅에 흩어져 살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아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민족으로 뭉쳐 살기를 시도한다. 바벨탑 이야기다. 창세기 11장 9절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는 바벨탑의 결말이자 ‘하나님의 응답’이다. 국정 교과서와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추진해온 세력은 역사적 해석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공인된 역사적 사실마저 왜곡해왔다. 학계에선 친일과 독재 미화가 목적이라고 우려한다. ‘하나의 언어’로 역사를 해석해 ‘그들만의 나라’를 세우려는 국정화 시도에서, 성경이 인간 역사의 교훈과 징계로 삼은 바벨탑 건설의 욕망이 엿보인다.

전정윤 사회정책부 기자
전정윤 사회정책부 기자
지금 황 부총리가 국정화에 ‘서명’해야 할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대통령 눈치보기’다. 의로운 일이 아닌데다 본인에게도 큰 오점이 될 국정화는 ‘부총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국정화를 막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바로 황 부총리다. 대한민국 초·중등교육법 제23조는 ‘교육부 장관은 교육과정의 기준과 내용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정한다’고 돼 있다. 교과서 발행체제를 결정할 ‘법적 권한’이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한테 있다. 아무리 대통령 탓을 해봐도 ‘면책’이 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황 부총리가 교육·사회 및 문화 정책을 총괄·조정하는 ‘부총리의 소명’을 다해 국정화만은 막아내길 바란다.

전정윤 사회정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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