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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소연의 볼록렌즈] 삽시간

등록 2015-09-16 18:45

오래 방치해둔 서랍 정리를 했다. 시가 잘 써지지 않을 때마다 정리벽이 도진다. 집안일을 갑작스레, 무척이나 꼼꼼하고 차근차근하게 해내고 싶어지는 것이다. 책상머리에 앉아 머리를 쓰는 시간이 길어질 때에, 몸과 손을 쓰고 싶어 근질거려 얻은 질병이다. 이불 빨래를 하고(삶기까지 한다), 자주 쓰는 컵과 식기를 싱크대 위에 일렬로 세워두고 열탕소독을 하고, 냉장고 속에 있는 무를 썰어 섞박지를 담갔다. 이 많은 일을 하루 동안에 모두 해치웠다. 조금 전엔 서랍 정리를 했다. 가족사진이 나왔다. 사진자료를 보낼 일이 있어 앨범에서 꺼냈다가 서랍 속에 그냥 넣어두었던 것이다. 사진 속 엄마는 지금 나보다 젊다. 그때 나는 사진관엘 처음 갔다. 사진을 찍을 때 펑 소리에 깜짝 놀랐더랬다. 사진관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대학 시절 습작시 묶음도 발견했다. 타자기를 장만하고서, 타자 치는 재미로 쓴 습작들이다. 종이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내 손가락이 누른 글쇠 하나가 벌떡 일어나서 먹끈을 때리는 소리. 워드프로세서로 인쇄한 습작들도 몇 장 있었다. 그때 나는 그 기계를 평생 사용할 줄 알았다. 앨범을 꺼냈다. 사진을 다시 제자리에 끼웠다. 두 손가락으로 필름을 들어올린 다음, 사진을 원래 자리에 얹고, 다시 필름을 덮었다. 앨범도 타자기처럼 지난 세기의 물건이 되었다. 서랍 정리를 했는데, 두 세기를 건너다녔다. 그렇게나 폼났던 것들이 무용해졌고 사라져갔다. 전생 같기도 하고 삽시간 같기도 하다.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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