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군이 돈을 벌려고 베트남에 간 1965년 가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 뒤 주로 서울에서 살았다. 하지만 누군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늘 ‘충남 예산’이라고 답한다. 어려선 서울깍쟁이라는 말이 싫어서, 자라선 한국 사회의 모든 것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서울이 민망해서다. 왜 예산이냐면, 친·외가 분들이 지금도 그곳에 산다. 추사 김정희가 나고 자란 곳이자, 윤봉길·김한종 등 일제강점에 맞서 목숨을 바친, 피가 뜨거운 이들을 배출한 곳이다.
어릴 때 예산에 갈 때면 지금은 사라진, 서울역 뒤편 서부역에서 비둘기호나 통일호를 탔다. 비둘기호는, 한반도의 평화처럼, 너무도 느려, 완행이라 불렸다. 지금도 예산행 기차에 몸을 실을 때면 백무산의 시 ‘기차를 기다리며’를 떠올린다. “새마을호는 아주 빨리 온다/ 무궁화호도 빨리 온다/ 통일호는 늦게 온다/ 비둘기호는 더 늦게 온다// 새마을호 무궁화호는 호화 도시역만 선다/ 통일호 비둘기호는 없는 사람만 탄다// 새마을호는 작은 도시역을 비웃으며/ 통일호를 앞질러 달린다/ 무궁화호는 시골역을 비웃으며/ 비둘기호를 앞질러 달린다// 통일쯤이야 연착을 하든지 말든지/ 평화쯤이야 오든지 말든지”
그랬다. 비둘기호(평화)는 통일호보다 느리고 누추했고, 무궁화호는 통일호보다 빠르고 깨끗했다. 평화와 통일은 길을 내주느라 무시로 시골역 한귀퉁이에 찌그러져 있어야 했다. 새마을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지금 케이티엑스가 그렇듯이. 새마을호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위해 농민·농촌의 고혈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짜내려는 속도전의 상징물이었다. 그때 대통령 노릇을 한 이가 박정희다. 나는 박정희가 만든 국정교과서와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며 초·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르신’이라는 입에 발린 말로 가난한 노인들만 농촌에 버려둔 채, 세계 10위권의 무역국가로 올라선 한국의 흑역사다.
8월15일, 해방 70돌을 맞아 ‘역사학과 민주주의, 그리고 해방’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역사문제연구소·역사학연구소·한국역사연구회 공동 주최로 열렸다. ‘역사학’과 ‘민주주의’와 ‘해방’이라…, 아름다운 조합이라 여겼다. 그게 아니었다. 역사문제연구소가 펴내는 계간 <역사비평>의 주간인 박태균 서울대 교수는 가을호 서문에서 이를 두고 “독재시대에 있던 민주주의의 화두가 역사학계의 중심적 화두가 된 것” “해외에서 볼 때 한국 역사학계의 화두는 30년 전의 구닥다리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라 자괴했다.
최근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은, 역사학계가 왜 ‘30년 전의 화두’를 다시 꺼내들 수밖에 없는지를 웅변한다. 그런데 이 논란은 이상하다. ‘국정화 반대’를 외치는 이는 천지에 차고 넘치는데, 교육부는 ‘결정된 바 없’단다. 하지만 다들 안다. 이 논란의 발화점이 박근혜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교학사 교과서가 ‘0% 채택률’로 주저앉자 대안이랍시고 호출된 게 ‘국정화’다.
대통령이 국정을 강제해도, 국정교과서가 오래가긴 어렵다. 시민사회가 그렇게 약하지 않다. 하지만 이 논란의 와중에 역사교육은 한참 후퇴했다. 고집불통 대통령을 상대로 ‘국정화 대신 검정 기준을 강화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읍소가 이미 차고 넘친다. 그만큼 역사교육의 다양성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세계 추세에 발맞춘 교과서 자유발행제는 언감생심이다. 차도살인. 대통령은 역시 ‘싸움의 달인’이다. 하지만 절망만 남은 건 아니다. 역사학·역사교육계가 진보·보수를 불문하고 ‘국정화 저지’를 외치고, 조중동까지 ‘국정화 반대’ 대열에 합류했다. 뒷걸음만 치던 한국 민주주의의 마지노선을 본 듯하다. 망외의 소득이다.
이제훈 사회정책부장 nomad@hani.co.kr
이제훈 사회정책부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