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통일외교 행보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9월4일, 중국 전승절 행사 참가와 한-중 정상회담 후 귀국 기내 기자회견에서 박 대통령은 “조속한 평화통일을 위해 중국과 긴밀하게 협의하기로 합의가 됐다”고 말했다. 9월26일 미국 싱크탱크 대표들과의 간담회에서는 “통일에는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만큼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주요국가와의 협력을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쯤 되면 10월16일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박 대통령은 통일외교 얘기를 또 꺼낼 것이다.
그런데 이런 통일외교 행보는 사실 일의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통일은 남북이 서로 하나가 되려는 힘, 즉 통일 구심력이 먼저 커져야만 가능해지는 일이다. 남북이 변변한 대화·협력도 안 하고 있는데 주변 국가들이 도와준다고 남북통일이 되는 건 아니다. 통일은 남북이 먼저 가까워진 뒤에야 비로소 기대해볼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통일은 단계적으로 접근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목표이자 시간이 걸리는 긴 과정이라는 점에서 ‘선 남북관계 개선 후 통일외교’가 제대로 된 순서다. 따라서 통일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쓰는 것도 사실은 성급한 일이다.
우리는 분단 70년에 7년 이상 남북관계가 꽉 막혀 있는데 독일은 올해 10월 벌써 통일 25주년이 된다. 독일 통일을 동독의 붕괴와 서독의 급작스런 흡수통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실체적 진실은 그게 아니다. 독일 통일은 1969년 집권한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추진하기 시작한 동방정책이 기민당으로의 정권교체(1982년)에도 불구하고 20년 동안 일관성 있게 추진된 결과다. 동방정책은 대동독 경제지원을 매개로 동서독 관계를 불가분의 관계로 만들어 나가면서 통일 구심력을 키우는 정책이었다. 통일 원심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소련과의 관계 개선도 소홀히 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중점은 동서독 관계 개선을 통한 통일 구심력 강화에 있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통일’이라는 말 대신 ‘내독관계’라는 말을 썼다.
우리도 이런 순서로 통일에 접근해야 한다. 지난 8월초 지뢰폭발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군사충돌 직전까지 갔다가 어렵사리 8·25 남북합의에 이르렀다. 그런데 정부는 남북관계에는 힘을 넣지 않고 국제사회에 우리의 통일을 도와달라는 부탁부터 하고 다닌다. 이건 일의 순서상 안 맞는 일이다. 동북아 국제정치의 특성에 비추어 보아도 비현실적인 일이다. 주변국가들은, 외교적 언사로야 남북통일을 지지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국가이익 때문에 통일 원심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순서가 틀린 일을 하면 일을 그르치고 시간만 낭비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정부는 통일외교보다 남북관계부터 챙겨야 한다. 남북관계는 방치한 채 ‘조속한 평화통일’ 운운하면서 통일외교에만 주력하면 북한 붕괴를 전제로 한 것이라는 오해를 비켜갈 수가 없다. 실제로 북한은 최근 체제통일(흡수통일)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20년 넘게 회자되어온 북한 붕괴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지만 앞으로도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통일외교보다 남북관계부터 개선하기 위해서는 일단 8·25 합의를 이행해 나가야 한다. 그러자면 북한이 신신당부하는 전단 살포 방지에 대해서 정부가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주면서 북한더러 대화에 나오라고 촉구해야 한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에 대해서도 미·중의 힘을 빌려서 막으려고 하기보다는 남북 당국 대화 석상에서 그런 일이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직접 설득해야 한다. 앞으로 남북대화 없는 상황에서 정부가 통일외교에 주력하면 북한은 그걸 흡수통일 전략으로 간주하고 8·25 합의 이행에 미온적으로 나올 것이다. 그리되면 박근혜 정부 후반기 한반도 안보 상황은 계속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황재옥 평화협력원 부원장
황재옥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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