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속담이 있다. 왜 중이었을까? 중 말고는 머리 깎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고 자라고 세고 빠지는 머리카락은 생로병사의 사고(四苦)를 표상하는 신체부위다. 삭발은 이 네 가지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결의의 표시였다. 다른 사람들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머리카락이 저절로 빠질 때까지 그대로 두었다. 하지만 속인들에게도 머리카락은 상징성이 풍부한 신체부위였다.
조선시대 어린아이들은 모두 남녀 구분 없이 머리카락을 땋아 늘어뜨렸다. 어른이 되면 남자는 머리카락을 정수리 위로 올려 묶어 상투를 틀었고, 여자는 뒤통수 부근에 쪽을 지은 뒤에 비녀를 꽂았다. 어른이란 ‘배필로 삼다’ 또는 ‘교합하다’라는 뜻의 ‘어르다’에서 온 말이다. 그러니 상투와 쪽 찐 머리는 상당히 노골적인 성의 상징이기도 했다. 남자의 상투를 덮는 모자와 여자의 쪽 찐 머리에 꽂는 비녀는 신분을 표시하는 구실도 했다. 1895년 단발령 실시로 상투를 잘린 평민 남성들이 거리에서 대성통곡한 것은, 신체발부를 훼손당하여 효를 그르친 데 대한 참회의 의미보다는 사회문화적으로 거세당한 데 대한 분노의 의미가 더 컸을 것이다.
고종은 단발령을 내리면서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리어’ 모범을 보였다. 고종의 상투를 자른 이가 정병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그의 머리를 보기 좋게 다듬은 이발사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때 서울에는 중국인과 일본인 이발사만 있었다. 이 땅에 처음 들어온 이발사는 서양인들의 집사로 따라온 중국인들이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바리캉 마르’사가 개발한 이발기가 도입된 것은 1905년경이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처음 상투를 자르는 남자들이 많았는데, 이를 ‘머리 올린다’고들 했다. 이 행위는 전근대 조선의 성인 남성이 현대 세계의 남성 일반으로 거듭나는 의례였다. 한국인들은 이발기계를 통해 집체성의 시대에서 개성의 시대로 이주했다. 이발기계를 집체성 확보의 수단으로 삼는 군대 같은 예외적 영역이 있기는 하지만.
전우용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