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나의 생존체력 단련기 / 권혁철

등록 2015-10-06 18:34

“언제 ‘운동’ 한번 같이 합시다.”

어느 정도 안면을 익힌 취재원들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처음에 등산이나 축구를 같이 하자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들이 말한 운동은 골프였다. 특히 중년 남성 취재원들에겐 운동은 골프의 동의어였다. 나는 이들과 운동을 하진 못했다. 내가 골프를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환경 피해 등을 걱정해 골프를 안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게을러서 못한다. 골프를 하려면 대개 휴일 새벽에 집을 나서야 한다. 나는 휴일 새벽에 일어날 만큼 부지런하지 못하다. 나는 휴일에는 아침 점심을 굶고 내리 잠만 자다 저녁 한끼만 먹을 때도 있다. 귀찮아서 세수도 하지 않는다. 휴일에는 몸과 마음이 너무 피곤해서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석달 전 휴일 오후였다. 나는 그날도 반나절 동안 집 안방 침대와 거실 소파를 오가며 비몽사몽 상태로 누워 있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와락 겁이 났다. “이러다 죽는 거 아냐?” 최근 멀쩡해 보이던 내 또래들이 갑자기 숨지거나 크게 아픈 경우를 봤기 때문이다. 덜 아프고 살기 위해서 생존체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12시간가량을 회사에서 지내 운동할 시간을 내기 어렵다. 짬이 나는 대로 틈틈이 운동하려고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운동시설을 찾았다. 회사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권투도장이 있었다. 점심시간에 밥을 간단하게 먹거나 일을 마치고 저녁에 권투도장에 갔다.

나는 군대 제대하고 1시간 이상 몸을 움직인 적이 없었다. 운동을 시작하고 보름 동안은 안 쓰던 온몸의 근육들이 아우성을 쳤다. 허리, 종아리가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같이 권투를 배우는 사람들은 대부분 20~30대였다. 원투 스트레이트를 때리고 훅을 날리는 이들은 고무공같이 탄력있고 미꾸라지처럼 유연했다. 그 옆에서 나는 녹슨 전차처럼 관절을 삐걱거렸고 삼복더위 논바닥의 소처럼 숨을 헐떡였다.

그래도 석달 넘게 운동을 하니 몸이 조금 좋아졌다. 예전에는 버스 정류장에서 출발하려는 버스를 타려고 5초만 뛰어도 숨이 턱까지 찼는데 요즘은 10초쯤은 뛸 수 있다.

그동안 권투도장에서 잽, 원투 스트레이트, 훅, 어퍼 등을 배웠다. 권투와 인생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주먹 가운데 훅이나 어퍼가 파괴력이 크다. 권투 경기를 보면 훅이나 어퍼가 상대를 무너뜨리는 결정타 구실을 한다. 하지만 훅이나 어퍼를 성공시키려면 끊임없이 잽을 던져 상대의 접근과 공격을 견제해야 한다. 원투 스트레이트로 상대의 양손 방어망인 가드를 무너뜨린 뒤에야 훅이나 어퍼 공격을 할 수 있다. 권투에서 잽과 스트레이트 없이 훅이나 어퍼 같은 큰 것 한방만 노리는 것은 허망한 도박이다. 흔히 한방에 훅 간다고 말하지만, 실제 권투에서 상대를 한방에 보내려면 그 전에 잔매를 엄청나게 때려야 한다.

잽을 잘 치려면 상대와의 거리와 움직임, 타이밍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잽은 보기에는 정말 단순해 보이지만 자신과 상대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성공이 가능한 기본기다. 잽은 <손자병법>의 ‘지피지기 백전불태’(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위태롭지 않다)란 말에 딱 들어맞는다.

나는 권투와 마찬가지로 인생도 훅보다는 잽이란 생각이 든다. 일상의 작은 성취 없이 단박에 대박은 없기 때문이다. 작고 쉬워 보이는 잽이 권투의 기본이듯이 지루하고 비루한 하루하루가 삶의 바탕이다.

권혁철 지역에디터
권혁철 지역에디터
주변에서 보면 보수 성향 사람일수록 시간을 내어 운동하고 진보개혁 성향의 사람일수록 몸쓰기를 꺼리곤 한다. 세상을 바꾸기 전에 내 몸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 이 가을, 걷기라도 하자.

권혁철 지역에디터 nura@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