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국가가 설정하는 배타적인 경계와 그 경계 안의 사람들이 갖는 지위로서 시민권은 종종 열악한 상황에 처한 난민들의 보편적인 인권과 충돌한다. 예컨대, 우리가 선처를 호소하는 난민들을 국경 밖으로 돌려세울 때 그들의 처지는 훨씬 더 나빠지거나 위험해진다. 이 경우에 우리의 행위는 어떤 근거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이곳은 우리들의 땅이라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국민국가의 국경통제는 과연 정당한 것일까?
자유방임주의자들은 국가의 영토가 시민들의 집합적 재산이 아니라고 보고 국가는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누렸던 권리를 보호하는 것 이외에 어떤 권한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자유방임주의에서 국경에 대한 개념은 나와 내 이웃의 땅을 구분하는 경계 이상의 도덕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개인들의 자발적 거래가 평화롭고, 사유재산을 가로지르거나 훔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범하지 않는 한 국가는 난민을 제한할 아무 권한도 갖고 있지 않는 것이다. 비공격성의 원칙으로 불리는 이러한 입장은 개인이나 개인 소유의 재산에 대해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거나 그 사용을 위협하지 않는 한 국가에 의한 강제력의 사용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공화주의자들은 세계적 차원의 분배적 정의가 아직 비현실적이며 정의에 관한 선택은 훨씬 작은 단위인 가족이나 종교사회, 국민국가 등에서 일어난다고 본다. 이 입장은 재분배가 일어나는 경계를 기준으로 외부와 구분되는 세계를 전제한다. 사람들은 이 경계 안에서 우선 자신의 동료들과 사회적 재화를 공유하고 교환하고 분배한다. 그러나 너무 작은 단위의 공동체는 자원의 한계 때문에 의미 있는 분배가 지속되기 어렵고 너무 큰 단위는 분배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유일하게 재분배적 정의의 단위로 기능하고 있는 국민국가는 새로 구성원이 되기를 원하는 외부인에게 시민이 되는 자격을 제시할 수 있고 가입을 제한할 수도 있다. 즉 이렇게 중요한 도덕적 의미를 갖는 국민국가의 경계를 아무나 횡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경계의 벽은 낮아져야 한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가 확보한 민주주의의 경험은 경계의 문제가 해결되고 난 후 비로소 민주주의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시민들이 소속감을 공유하는 특정한 공간 안에서만 정치적 정당성 문제 해결과 재분배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경계 안의 배타적 지위로서 시민권을 강화하는 일과 경계를 넘어서는 보편적 인권을 양립시키려는 노력 앞에는 인류의 보편성과 세계성이 경계를 중심으로 구획된 근대국민국가의 출현에 의해 본격적으로 고양되기 시작했다는 역설이 자리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어떤 국가도 국경을 완전히 철폐하자고 주장하지 않지만 동시에 전면적인 국경 봉쇄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보편적인 인권존중과 합리적인 국경통제 사이의 딜레마는 무엇보다도 국민국가의 경계가 민주주의 완성에 기여했던 긍정적 차원의 의미를 실현하는 일, 즉 개인의 자유와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고 경계의 가치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민주적인 정치공동체를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국경통제가 그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국민국가의 경계가 갖는 의미의 긍정적인 차원인 사회통합과 정치적 정당성을 해결함으로써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진보적 결사체라는 점이 충분히 구현되어야 하고, 동시에 부정적인 차원인 인종과 문화를 중심으로 외부에 대해 배타성을 심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스스로 훼손해온 잘못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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