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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권총

등록 2015-10-26 19:31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30분께, 하얼빈역 승강장에서 여섯 번의 총성이 울렸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브라우닝 권총에서 발사된 총알은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고 다른 일본인 세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 총성은 이천만 한국인의 뇌리에 울려 퍼진 자각의 종소리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이 이재명의 비수에 찔렸지만 용케 살아났다. 이재명이 권총을 사용했다면, 이완용도 이토와 같은 방식으로 죽었을 것이다.

휴대하기 쉽도록 화승총의 총신을 줄인 권총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4세기였고, 16세기 중엽부터는 기병과 해적들이 주로 사용했는데 발화 방식이 불편하여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다. 19세기 초 뇌관식 격발장치가 발명된 이후에야 권총은 군인과 민간인,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는 대중적 화기(火器)로 자리 잡았다.

단총, 육혈포 등으로도 불린 권총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개항 직후부터 외국 군인과 선교사들이 휴대했던 듯하다. 1895년 을미사변 직후에는 캐나다인 선교의사 에이비슨(Oliver R. Avison)이 권총을 들고 고종 주변을 지켰고, 1900년에는 한국 헌병들도 권총을 지급받았다.

휴대와 은닉이 쉬운 대신 적중도가 떨어지는 권총은 자살용, 암살용, 범죄용, 즉결처형용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모형 권총은 활극(活劇)과 액션영화의 필수 소품이기도 해서, 권총 등장 여부가 현대물과 역사물을 나누는 기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 침략기에는 안중근, 전명운, 장인환, 나석주, 김상옥 등이 권총으로 의거(義擧)를 단행했고, 해방 이후에는 송진우, 장덕수, 여운형, 김구 등이 권총에 맞아 사망했다. 1970년대에도 육영수와 박정희가 권총에 의해 세상을 떴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암살에는 대개 권총이 사용되었으니, 링컨과 케네디의 목숨을 앗아간 것도 권총이었다. 권총은 비록 작지만, 현대사에 큰 파란을 일으킨 물건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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