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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대통령 집무실의 비밀 / 박찬수

등록 2015-11-10 18:32수정 2015-11-11 16:17

조선시대 왕궁이 그랬듯이 21세기 청와대도 풍수지리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하다. 1989~91년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 경내에 2층짜리 옛 건물을 헐고 새로 본관을 지을 때 특히 그랬다. 궁궐을 연상케 하는 웅장한 본관을 완성한 건 현대 건축이지만, 그 위치를 정하는 데엔 심리적인 부분이 한몫했다. 옛 본관은 서울시청에서 광화문과 경복궁을 잇는 세종로의 일직선상에 위치했다. 새 본관은 이 선상을 약간 비켜나 세웠다. 당시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인사는 “본관의 대통령 집무실이 서울역 쪽에서 올라오는 센 기운을 피하도록 하려고 위치를 약간 바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6공 이전에 옛 본관 집무실에서 일했던 역대 대통령들의 말로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1990년 2월엔 신축하는 대통령 관저 뒤편 숲에서 ‘천하제일복지’라고 새겨진 표석이 발견됐다. 조선시대 누군가의 예시일 거란 주장이 있지만, 일제가 조선총독 관저를 지으면서 일부러 표석을 묻었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풍수학의 대가로 꼽히는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청와대 터가 복지(福地)란 설에 비판적이다. 그는 “청와대 지대가 꽤 높아 남산과 서울 시내를 모두 굽어볼 수 있다. 대통령은 모든 걸 파악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이런 곳에 외로이 살다 보면 독불장군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 적이 있다.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본관의 위치를 약간 비튼 건, 그 이후 대통령들을 보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던 듯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이 ‘천하제일복지’라는 표석의 효력은 의문이다. 최 전 교수의 지적대로 ‘소통을 거부하고 현실을 정확히 보지 못하는’ 대통령들은 그 이후에도 줄지어 나왔다.

최근 국회에서 여야가 한목소리로 대통령 집무실과 비서실을 하나로 통합한 비서동을 지으라고 권고했다. 이를 위한 설계용역 예산을 주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청와대가 거부했다고 한다. “대통령과 직원(참모) 소통엔 문제가 없기 때문”이란 게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의 설명이었다. 지금 본관과 비서동은 500m쯤 떨어져 있다.

오죽 답답했으면 예산 깎는 데 선수인 국회의원들이 그런 제안을 했을까 싶지만, 사실 문제의 본질은 다른 데 있다. 백악관처럼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에 참모들의 방을 줄지어 마련해도 대통령이 집무실에 나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본관 집무실보다 관저에서 주로 일을 한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세월호 침몰 때의 ‘7시간 미스터리’가 그래서 나왔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대통령은 일어나시면 출근이고 주무시면 퇴근”이란 명언도 그래서 회자됐다.

대통령이 집무실엔 일주일에 몇 번 정도 나오시냐는 질문에 청와대 관계자는 “우리가 답변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복수의 전·현직 청와대 비서관은 “박 대통령은 본관 집무실뿐 아니라 위민관(비서동)의 집무실도 찾는다. 또 과거에도 관저에서 업무를 본 대통령들이 있다. 집무 공간이 어디냐보다 항상 전화로 연결이 되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라고 말했다.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나라에서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일하는지 여부를 비밀에 부치는 나라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 이런 구조에서 비서실을 새로 짓는다고 소통이 이뤄질 수 있을까, 대통령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데.

박찬수 논설위원
박찬수 논설위원
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은 집무실에 매일 아침 정시 출근해서 비서관들과 가장 많이 어울린 대통령으로 꼽힌다. 노 대통령은 참모들을 옆방에 두려고 아예 본관 구조를 바꾸려다 포기한 적도 있다. 그렇게 해도 ‘소통이 부족하다’는 비판에 늘 시달렸다. 하물며 구중궁궐의 어딘가에서 혼자 일하는 대통령은 어떤가. 독불장군을 단지 풍수지리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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